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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진산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1476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봉정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2년 - 「파진산 이야기」 한민에서 발행한 『여기가 부여다』에 수록
관련 지명 파진산 -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봉정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백제군|소정방
모티프 유형 역사 상황|지명 유래담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봉정리파진산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

[개설]

「파진산 이야기」은산당산성(恩山 堂山城) 앞산인 파진산(破陣山)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이다. 백제군이 당나라군에게 패한 당산성 앞산이라 하여 ‘파진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지명 유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파진산 이야기」는 1992년 한민에서 발행한 『여기가 부여다』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옛날 백제 성왕(聖王)사비(泗沘)로 천도하여 백제가 다시 중흥하였다. 중요한 곳에 성을 쌓고 군사들을 양성하여 이전에 빼앗겼던 땅들을 도로 찾게 되었으며, 나아가 새롭게 빼앗은 성들도 있었다. 나라가 다시 안정되며 문화의 수준도 매우 높아져 이웃 나라들에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의자왕(義慈王) 대에 이르러 몹시 흔들렸다. 한동안 나라가 평안하므로 집집마다 노래와 춤이 끊이질 않았는데, 풍족한 생활이 계속되다 보니 점점 게을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신라에서는 이때를 노려 당나라와 연합한 뒤 군사를 데리고 백제로 진격하였다.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백제에서는 부랴부랴 군사를 모았는데, 오합지졸의 군사들뿐이었다. 제1선인 황산(黃山)에 5,000명의 결사대를 보냈으나 군사의 수가 부족하여 패배하였다. 제2선인 당산성과 제3선인 반월성(半月城)에서는 장정들을 최대한 모으기는 하였으나 훈련이 되지 않은 군사이므로 수만 명이 모였어도 적을 막을 수 있는 인원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당산성에서는 본진을 성안에 두고 앞산에 실전지를 두어 군사를 막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산성에 모인 사람들은 훈련이 되지 않고 군사의 수도 부족하여 갖은 꾀를 다 내었으나 당나라 소정방의 군대를 대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당산성의 앞산에 섬거적을 쌓아 군량을 많이 쌓아 둔 것처럼 보이려고 하여 보았다. 하루는 쌀을 수백 석씩 씻어서 쌀뜨물을 일부러 흘려보내어 군사의 수가 많은 것처럼 보이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소정방은 매우 눈치가 빠른 장수였고, 백제군의 전략과 상관없이 공격하므로 할 수 없이 제2선 당산성 역시 패진을 당하였다. 당나라군은 당산성을 돌파하자 파죽지세로 제3선 반월성 남쪽으로 몰려들어 왔다. 반월성의 군사들 역시 당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 반월성도 금세 뚫려버렸다. 이후 백제군의 제2선이 패군한 당산성의 앞산을 ‘파진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파진산 이야기」에는 당나라군이 수로를 통하여 백제로 진격하였던 당시의 역사 상황 모티프가 담겨 있다. 역사적 상황이 현재의 지명에 대한 유래로서 기능하는 지명 유래담으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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