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천 3·1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456
한자 林泉 三·一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헌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6일연표보기 - 임천 3·1 운동 발생
발생|시작 장소 임천 3·1 운동 -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팔충리 무쇠점마을지도보기
종결 장소 임천 3·1 운동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박용화|황우경|박성요|황금채|문재동|최용철|정판동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개설]

부여 지역에서의 독립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6일 임천면에서 시작되었다. 임천면의 천도교인들은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배포하는 활동을 전개하며, 전국적인 만세 운동을 부여 지역에서도 확산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역사적 배경]

일본 제국주의는 1910년 8월 22일 ‘병합’ 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일제는 식민지의 최고 통치 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식민지 지배 구조로 재편하기 위하여 1910년대에 폭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한민족은 무단 통치하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당하였다. 학교에서는 민족 교육이 억압받고, 종교계에서는 민족적 신앙이 탄압당하였다.

일제는 경제적으로도 우리 민족을 수탈하였는데, 1910년에는 ‘회사령(會社令)’을 실시하여 민족 자본가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1910~1918년에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불법으로 토지를 침탈하여 온 일본인의 토지 소유가 법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광대한 토지가 국유지로 편입되었다. 이때 일제는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분하에 토지에 대한 지주의 권리만 인정하였으며 경작권 등 농민의 여러 권리는 완전히 부정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농민이 몰락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도시로 흘러들어 도시빈민·노동자가 되었다. 당시 노동자가 된 조선인들은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대우, 민족 차별 등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본인 노동자에 비하여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하였다. 그 결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전 민족적으로 고조되었다. 이러한 전 민족적인 민족해방 의지를 바탕으로 1910년대에는 국외에서의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 국내에서의 비밀 결사 운동, 교육 문화 운동 및 생존권 수호 투쟁 등을 통하여 운동 역량이 강화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1910년대 말에 국제 정세가 크게 변하였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 방안에 민족자결주의를 적용하자고 주창하였다.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약소 민족을 크게 고무하여 민족해방운동을 고양시켰다. 이에 따라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에서 시작된 3·1 운동은 1919년 5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경과]

임천면에서 전개된 3·1 운동은 1919년 3월 6일 이른 아침, 충화면 팔충리의 무쇠점마을에서 시작되었다. 박용화를 비롯하여 충화면임천면 천도교도들은 3월 3일 천도교구를 통하여 「독립선언서」를 수령하였고, 3월 5일에는 박용화의 집에서 합숙하며 만세 운동을 모의하였다. 모의에 참여한 인물은 박용화를 비롯하여 황우경, 박성요, 황금채, 문재동, 최용철, 정판동 등이었다. 본래 모의에 참여한 인물들과 함께 50명 내외의 인원이 임천면으로 향하여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박용화 등 7명뿐이었다. 박용화 등은 임천면에 도착하여 독립선언서를 곳곳에 붙였고, 시장 등 인파가 많은 곳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인파를 모은 후 면사무소와 보통학교 등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후 임천 헌병출장소 앞에서도 만세 시위를 지속하다가 결국 7명 전원이 체포되고 말았다.

[결과]

공주지방법원에서 황우경박성요는 징역 1년, 문재동과 박용하는 징역 7월, 최용철은 징역 6월을 선고받았고, 황금채정판동은 태형 60대에 처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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