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1114
한자 儒敎
영어공식명칭 Confucianism
이칭/별칭 공교,공자교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인성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종교적으로 따르는 문화 체계.

[개설]

유교는 공자(孔子)를 시조로 모시는 사상으로, 공교(孔敎) 또는 공자교(孔子敎)라고도 불린다. 인(仁)과 예(禮)를 통하여 공자·맹자(孟子) 등 유가(儒家)의 정치사상과 학문 수양, 생활 의례 등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현세적 사상이자 일종의 종교이다. 유교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아시아 국가에 전파되어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비교적 이른 시기에 유교가 유입되었으며, 대체로 삼국 시대 이전에 한자와 함께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 시대 이후 나라를 다스리는 이념으로서 활용됨으로써 발전하였다.

충청남도 부여 지역의 경우, 고대부터 유교가 보급되어 꾸준히 발전하는 양상을 나타낸다. 이를테면 백제 사비기에는 유교적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태학(太學)이 설립되었으며, 당시에 유교 경전 등을 학습하는 데에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목간(木簡)이 출토되어 2018년 공개되었다. 고려 시대 이후의 유교는 과거제(科擧制)의 실시와 향교(鄕校)의 설립으로 저변이 더욱 확대되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이존오(李存吾), 조신(趙愼), 김거익(金居翼) 등 절의를 지킨 유학자들이 부여 지역과 연을 맺었다. 조선 시대에는 향교의 설립, 석전제(釋奠祭), 향음주례(鄕飮酒禮)의 시행, 서원의 건립, 정려(旌閭)의 보급 등을 통하여 부여 지역의 유교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백제 사비기와 고려 시대의 유교]

부여 지역의 유교는 일찍이 백제 사비기에 뚜렷한 흔적을 보였다. 유교적 정치 이념에 충실한 인재를 양성하는 중앙 국가 교육기관인 태학이 당시에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백제 시대에 태학이 있었다는 사실은 2013년 중국에서 발견된 백제 유민 진법자(陳法子)의 묘지명(墓誌銘)에 기록되어 있다. 또 2011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서 출토된 목간은 태학에서 유학의 경전인 오경(五經)과 역사서 등을 가르쳤음을 실증하는 유물이다. 쌍북리 목간 중 2018년 공개된 논어 목간은 『논어(論語)』의 「학이(學而)」편 일부가 적혀 있어, 『논어』를 공부하는 데에 목간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비도성에서 유교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은 사(士) 계층이었다. 한문을 해독하고 구사할 수 있었던 사 계층은 유교 교육을 통하여 관료가 될 수 있었던 지배층이었다.

고려 후기에는 의리 정신을 앞세운 유학자들이 부여와 인연을 맺게 된다. 신돈(辛旽)의 전횡을 탄핵하였다가 간신히 극형을 면하고 부여에 은거한 이존오(李存吾), 고려가 망하자 본래 이름인 ‘사렴(思廉)’을 ‘신(愼)’으로 바꾸고 부여에 은둔한 조신(趙愼), 이성계와 우정이 돈독하였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부여에 은거하다가 생을 마감한 김거익(金居翼)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러한 유학자들의 절의 정신은 조선 시대에도 면면히 이어졌다.

[조선 시대의 유교]

조선 시대는 유교를 나라의 근간으로 내세워, 정치와 교육의 근본 이념으로 삼았다. 통치 이념을 확고히 다지려면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의 양성 또한 절실하였기에, 인재 양성과 교화에 역점을 두어 유교를 민간에 보급하고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하여 대표적인 공교육 기관으로 서울에 성균관을 두고 각 지방에는 향교를 건립하였다. 조선 전기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현재의 부여 지역에 설립된 부여향교(扶餘鄕校), 석성향교(石城鄕校), 임천향교(林川鄕校), 홍산향교(鴻山鄕校)는 유교 교육을 진흥하고 선현에게 제사하며 공론을 모으고 유교적 덕목으로 사회를 교화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런 영향으로 부여 지역에서는 유교의 절의 정신을 숭상하는 기풍이 더욱 높아졌다. 현재 이들 네 향교는 모두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부여 지역에는 학문 강론과 향사의 기능을 지닌 서원이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는데,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각각 지정된 창강서원(滄江書院)·칠산서원(七山書院)·퇴수서원(退修書院)[현재의 반산서원(盤山書院)]·동곡서원(東谷書院)을 비롯하여 부산서원(浮山書院), 간곡서원(艮谷書院) 등 모두 여섯 곳이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창강서원은 1629년(인조 7)에 추포(秋浦) 황신(黃愼)[1562~1617]을 기리고자 세워졌고, 이어 칠산서원이 1687년(숙종 13)에 시남(市南) 유계(俞棨)[1607~1664]를 기리고자 건립되었다. 창강서원칠산서원은 임금으로부터 편액(扁額)·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은 사액서원(賜額書院)이기도 하다.

18세기가 되어 부산서원이 1719년(숙종 45)년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1574~1656]과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1585~1657]를 기리고자 건립되었다. 1730년(영조 6) 유동수(柳東秀)[1579~1654]를 배향한 간곡서원, 1757년(영조 33) 조박(趙璞)[1577~1650]·조견소(趙見素)[1610~1677]·조성복(趙聖復)[1681~1723]을 배향한 퇴수서원이 잇따라 창건되었다. 이후 동곡서원이 회양도호부사 조신(趙愼)[?~?]을 기리고자 철종 재위 시기[1849~1863년]에 창건되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 복원되었다.

부여의 서원들은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으면서 대부분 정치적으로 노론에 속한 유력 가문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17세기 이전 부여의 유력 가문이자 서인이었던 여흥 민씨(驪興 閔氏)·기계 유씨(杞溪 兪氏)·전주 이씨(全州 李氏)·하동 정씨(河東 鄭氏) 등은 17세기 이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하자 노론에 속하였다. 17세기에 세워진 창강서원칠산서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곳의 서원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에 세워졌는데, 갑술환국으로 노론이 재집권하자 부여의 유력 가문들이 중앙의 노론 세력과 결탁하여 혈연과 혼맥을 강화하면서 새로운 서원들을 세운 것이다.

한편, 2023년 현재 충청남도 부여군에는 25곳의 사우(祠宇)가 있는데, 부여 지역을 대표하는 사우로는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의열사(義烈祠)와 충청남도 기념물 창렬사(彰烈祠)를 들 수 있다. 최초의 사우는 1575년(선조 8) 부여현감 홍가신(洪可臣)이 건립한 의열사이다. 의열사에는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흥수(興首)·계백(階伯)을 비롯하여 고려 후기의 충신 이존오(李存吾), 조선 후기의 지사 정택뢰(鄭澤雷), 충신 황일호(黃一皓)가 함께 배향되었다. 또한 1621년(광해군 13)에 세워진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청일사(淸逸祠)김시습(金時習)과 김효종(金孝宗)을 모셨다. 창렬사는 삼학사의 절의를 기리고자 1717년(숙종 43) 세워져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를 배향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건재한 사우이다. 일제 강점기 및 광복 이후 새롭게 건립된 사우로는 백제의 충신 성충·흥수·계백을 모신 삼충사(三忠祠)[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나 삼천궁녀의 넋을 기리는 궁녀사(宮女祠), 그리고 백제 8충신의 위패를 모신 팔충사(八忠祠) 및 백제의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임천의 충혼사(忠魂祠) 등이 있다. 이러한 사우들에서는 해마다 봄가을에 선현에 대한 사우향사(祠宇享祀)를 모시고 있다.

[현대의 유교]

현대에 들어서 부여 지역 유림들은 주로 향교와 서원을 중심으로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하며 유교적 이념을 실천하고 있다. 2023년 현재 부여 지역의 유교 기관으로는 향교 4곳, 서원 6곳, 사우 25곳이 남아 있다. 유림 관련 조직으로는 유도회가 있으며 충청남도 지역 지회 총 35개 중 부여 지역에는 부여향교유도회, 홍산향교유도회, 임천향교유도회, 석성향교유도회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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