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봉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705
한자 池鳳彩
영어공식명칭 Ji Bongchae
이칭/별칭 서오(瑞五)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792년 - 지봉채 하양현민 구휼
활동 시기/일시 1793년 - 지봉채 하양현민 구휼
출생지 지봉채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지봉채 거주지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지도보기
성격 의인
성별
본관 충주
대표 관직|경력 유학(幼學)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의인.

[개설]

지봉채(池鳳彩)는 18세기 후반 대기근이 일어나자, 원납곡을 내어서 하양현민(河陽縣民)들을 구휼하는 데 일조하였다.

[가계]

지봉채는 중국에서 귀화한 지경(池鏡)의 후손이다. 그의 선대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현달한 인물들이 많았지만, 7대조 할아버지 송화 현감 일청(一淸) 지연(池淵) 이후 관직에 진출한 인물들이 없었다. 증조할아버지 통덕랑(通德郞) 지응원(池應元) 대에 영남으로 이주하였다. 아버지는 지부담(池富聃)이다. 상산(商山) 지덕붕(池德鵬)지봉채의 증손자이다.

[활동 사항]

지봉채는 성품이 어질어서 빈곤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구제했다고 전한다. 1792년(정조 16)과 1793년(정조 17)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 조(租) 50섬을 내어서 하양현민들을 진휼(賑恤)하였다. 이 일로 모든 현민들이 지봉채의 어진 은혜를 칭송했다고 한다. 이때 양태화(梁太和)도 400섬, 김이택(金麗澤)도 50섬씩을 내었다고 한다. 당시의 원납곡은 1795년(정조 19) 5월 8일 왕명으로 인해 다시 돌려받게 되었다.

한편, 1793년 5월 하양현감 류병균(柳秉均)의 상서에 의하면, 1792년 겨울에도 지봉채와 김이현(金履鉉)이 사직단(社稷壇)과 여단(厲壇) 중건을 위해 150냥과 200냥씩을 원납(願納)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지봉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하양현청의 향사당(鄕射堂)에 행적을 기록하여 편액을 걸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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