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757
한자 朴晩善
영어공식명칭 Park Manse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영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4년 3월 1일연표보기 - 박만선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42년 - 박만선 중동학교 재학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박만선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몰년 시기/일시 1999년 2월 8일연표보기 - 박만선 사망
출생지 박만선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하대리 510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박만선 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35
묘소 박만선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동북로71길 33[신암동 산 27-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만선(朴晩善)[1924~1999]은 1942년 학도지원병 모집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43년에는 영천신사(永川神社) 소훼(燒燬), 1944년 대구주둔 일본군 부대의 탄약고 폭파를 추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가계]

박만선은 1924년 3월 11일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하대리 510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박진식(朴震植), 어머니는 강복수(姜福壽)이며, 부인은 도정선이다.

[활동 사항]

박만선은 어린 시절 큰아버지 박정식(朴正植)과 외숙부 강종호(姜鍾鎬)에게 한학(漢學)을 배웠다.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에 재학 중이던 1942년 3월, 일본군에 복무할 학도지원병 모집에 반대하는 활동을 은밀히 전개하였다. 이어 만주로 건너가 9월에 지린성[吉林省] 신징[新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재원 박동만(朴東萬)과 접촉하고 특수 임무를 부여받아 국내로 돌아왔다. 귀국 후 박만선은 1943년 5월 동갑의 대구 출신 박기수(朴基秀)와 접선했다. 박기수는 일본 오사카[大阪] 유학 중 동포 학생들과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기공창(機工廠) 제조품목 탐지 등의 활동을 벌였던 인사로 역시 임시정부 요원의 지령을 받고 밀입국한 특파원이었다.

박만선과 박기수는 박만선이 살았던 영천으로 가서 동갑 청년 이영환(李榮還)·김영길(金永吉)·이상진(李相鎭) 3인을 포섭했다. 그들은 영천 교촌의 영천향교 옆 사망대(四望臺) 중턱에 있는 신사(神社)를 불 질러 없애버리기로 결의하였다. 드디어 1943년 4월 어느 날 심야에 신사의 벽판지를 헐어 그 안쪽에 종이쪽들을 흩어놓고 촛불을 켜놓아 불이 번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순찰 일경이 발견하고 곧 진화해버리는 바람에 신사 소훼 기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신사 소훼 기도가 실패하자 박만선은 대구 외곽에 주둔 중인 일본군 부대의 탄약고를 폭파하려 하였다. 탄약고 폭파 계획을 추진하던 중 동지를 가장해 접근한 헌병보 박천만(朴千萬)의 밀고로 1944년 8월 23일 대구헌병대에 체포되었다. 박만선은 1945년 5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불경, 방화예비 등의 죄목으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8월 20일 출옥하였다.

[묘소]

박만선의 묘소는 신암선열공원[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동북로71길 33]에 있다.

[상훈과 추모]

박만선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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