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53
한자 李承遺墟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파1길 24-8[신파리 131]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소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세기 - 이승 유허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52년 - 이승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98년 - 이승 사망
현 소재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파1길 24-8[신파리 131]지도보기
원소재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파1길 24-8[신파리 131]
성격 유허비
양식 입비
관련 인물 이승|김도화|정재교
크기(높이, 너비, 두께) 145㎝[높이]|71㎝[너비]|19㎝[두께]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파리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이승을 기리기 위하여 19세기에 세운 비.

[개설]

이승(李承)[1552~1598]은 본관이 전주(全州), 자가 선술(善述), 호가 청휘당(晴暉堂)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문하에 들어갔고,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와 교유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파리 신당(新堂) 마을에 자리 잡고 옛집을 고쳐 청휘당이라 이름 짓고 살았다. 사후에 신계서원(新溪書院)에 배향되었다.

[건립 경위]

19세기에 신계서원이 훼철된 후, 성주 지역 유림들이 이승을 기리기 위해 유허비로 쓸 돌을 마련한 후 이승의 후손 이한의(李漢儀)가 김도화(金道和)[1825~1912]에게 비문을 청하였다. 이에 김도화가 유허비가 세워지게 된 경위를 기록하고 명(銘)을 지어 신계서원 터에 이승 유허비(李承遺墟碑)가 세워지게 되었다.

[위치]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파리 신당 마을 모휘재에 자리하고 있다. 적송교를 건너 청휘당을 지나 좌회전하면 된다. 성주군청에서 남서쪽으로 약 18㎞ 떨어진 곳에 있다.

[형태]

이승 유허비는 좌대(座臺), 비신(碑身), 비개석(碑蓋石)으로 된 입비의 형태이다. 좌대는 귀부(龜趺), 비개석은 이수(螭首)이다. 높이 145㎝, 너비 71㎝, 두께 19㎝이다.

[금석문]

비신에는 사면에 서문(序文)과 명(銘)이 있는데, 앞면에 세로 한 줄로 ‘청휘당 이 선생 유허비명 병서(晴暉堂李先生遺墟碑銘并序)’라 새겨져 있다. 비신 앞면 상부의 전서(篆書)는 ‘청휘당 이 선생 유허비명(晴暉堂李先生遺墟碑銘)’이다. 비문은 김도화가 짓고 정재교(鄭在敎)가 글씨를 썼다.

[의의와 평가]

이승 유허비는 성주 지역에서 성리학의 큰 영향을 끼친 김우옹·정구와 교유하고,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펼쳤던 이승의 행적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이승·김우옹·정구의 관련성은 성주 지역 성리학 및 학맥의 흐름을 보여준다. 더불어 이승에 대한 성주 지역 유림들의 숭조 의식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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