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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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萊鄭氏 |
영어의미역 | Dongrae Jeo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집필자 | 김복영 |
세거지 | 안동시 송천동|안동시 길안면 현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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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시기/연도 | 고려 말 |
성씨시조 | 정회문(鄭繪文) |
입향시조 | 정승원(鄭承源) |
[정의]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하고 정승원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안동시 세거 성씨.
[개설]
안동의 동래정씨는 기세조 정지원(鄭之遠)의 9세손 정승원(鄭承源)이 안동으로 이거한 이래로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형성된 가문이다.
[연원]
동래정씨는 본래 신라 6부촌의 하나인 진지촌장 지백호(智白虎)의 후손이다. 서기 32년(유리왕 9) 지백호가 정씨(鄭氏)로 사성되어 경주(慶州)가 본관이 되었고 그 뒤 동래(東萊)로 분적 되었다고 한다. 시조 정지원이 보윤호장을 지냈고 아들 정문도, 손자 정목이 현달하여 후손들이 그의 세거지인 동래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정지원의 5세손에서 정보(鄭輔)를 파조로 하는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와 정필(鄭弼)을 파조로 하는 첨사공파(詹事公派)로 크게 나뉘는데 안동 지방에는 첨사공파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입향경위]
정필의 현손으로 고려 말 예문관응교를 지낸 정승원이 안동 서문 밖 안기동에 잠시 거주하다가 재차 현재의 풍천면 구담리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정승원의 손자 정귀령(鄭龜齡)은 구담에서 다시 용궁으로 이거하였다. 정귀령의 맏아들 정옹(鄭雍)은 정지주, 정사주, 정종주, 정복주(鄭復周) 등 다섯 아들이 있는데 그중 넷째 정복주의 아들 정환(鄭渙)은 1489년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가 되었지만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죽었다.
정환의 증손 정식(鄭湜)의 아들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은 풍양 우망리(현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에 태어났지만 전주류씨(全州柳氏)인 류복기(柳復起)의 사위가 되어 현재의 안동시 송천동으로 이거하였다. 160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도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고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학문에만 정진하였고, 1600년경에는 산천 경관이 아름다운 영양 입암에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하는 등 강호처사로의 삶을 살았다.
[현황]
현재 안동, 예천 등지에 거주하는 동래정씨는 대개 정환의 후예이며, 정영방의 아들 4형제 중 맏아들 정혼(鄭焜)의 후손은 지보 익장에, 셋째 정렴(鄭燫)의 후손은 선산에, 넷째 정제(鄭焍)의 후손은 영양 입암 연당에 정착하였고 둘째 정행(鄭烆)의 후손이 안동시 송천동과 길안면 현하리에 정착하여 살아가고 있다.
[관련유적]
송천동 선어대(仙魚臺)에 정영방이 책을 읽고 수신하던 읍취정(揖翠亭)이 있고, 증손 정지언이 강학하던 시사정이 있다. 영양 연당리에는 정영방이 지은 경정(敬亭)과 서석지(瑞石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