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5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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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籒神道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궁평리 산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민규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67년 - 강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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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51년 - 강주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654년 - 강주 신도비 건립 |
현 소재지 | 강주 신도비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궁평리 산5-6 |
성격 | 비석 |
양식 | 비좌이수 |
관련 인물 | 강주 |
재질 | 대리석|화강석 |
크기(높이,너비,두께) | 162㎝[높이]|66㎝[너비]|22㎝[두께]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궁평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신도비.
[개설]
강주(姜籒)[1567~1651]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관이 진주(晋州)이며, 자가 사고(師古), 호가 죽창(竹窓)이다. 진사시와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아들 강백년(姜栢年)[1603~1681]이 고관에 올라 사후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장에 능하고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다.
[건립 경위]
강주 신도비는 충청도관찰사에 오른 아들 강백년이 1654년(효종 5)에 건립하였다. 대사성 김신국(金藎國)[1572~1657]이 비문을 짓고, 강주의 문인이자 송설체(松雪體)에 능한 유심(柳淰)[1608~1667]이 비문을 썼으며, 전서(篆書)는 형조판서 김광욱(金光煜)이 썼다.
[위치]
강주 신도비는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궁평리 산5-6, 궁평저수지[송악저수지] 동쪽 길가에 세워져 있다. 동쪽의 방미산 중턱에 있는 강주 묘의 서쪽 150여m 지점이다. 국도 39호선[외암로]에서 궁평리 마을 길로 접어들어 마을을 지나며 북쪽으로 600m 정도 들어가면 오른쪽 산자락에 강주 신도비가 보인다.
[형태]
강주 신도비는 네모난 받침돌[方趺], 비신(碑身), 이수(螭首)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비좌이수형 비석이다. 받침돌은 화강석, 비신과 이수는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 받침돌의 윗면에는 연잎이 조각되어 있으며, 4면에 구름처럼 생긴 풍혈(風穴) 혹은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비신은 회백색의 대리석으로 앞뒷면에 글자를 새겼다. 비신 상단에는 ‘증좌의정죽창강공신도비명(贈左議政竹窓姜公神道碑銘)’이 전서체(篆書體)로 조각되어 있다. 비신은 높이 162㎝, 너비 66㎝, 두께 22㎝이다. 이수는 비신과 비슷한 대리석으로 제작되었으며, 비신과 따로 제작되어 비신 위에 올려져 있다. 이수 앞면에 용 두 마리, 뒷면에 용 한 마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용의 아래쪽에는 하늘로 향한 연꽃잎[仰蓮]이 조각되어 있다.
강주 신도비는 이수의 형태가 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1634년에 건립한 김장생(金長生)의 신도비, 1643년에 건립한 익성군(益城君) 이형령(李亨齡)의 신도비, 경기도 안성시에 있는 1645년에 건립한 이신성(李愼誠)의 신도비 등과 석질과 조각 양식이 비슷해서 같은 지역에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금석문]
증좌의정죽창강공신도비명(贈左議政竹窓姜公神道碑銘)
[의의와 평가]
강주 신도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신과 이수를 올린 비좌이수형 비석으로, 조각 솜씨가 뛰어나 미적 조형성이 높으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강주 자신은 주로 대전시 회덕 일대에 거주하였으나 뿌리가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이어서, 강주의 후손 중에는 다시 아산 지역으로 돌아온 사람들도 있다. 당시 온양의 유학자 시암 조상우(趙相禹)[1582~1657]를 사위로 맞이하였으니, 아산 지역 유력 가문의 분화와 이주, 교류 등도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료이다.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으나, 강주 신도비는 지역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