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0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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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圓光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이종문 |
출생 시기/일시 | 547년 - 원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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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서품 시기/일시 | 559년 - 원광 출가 |
수학 시기/일시 | 571년 - 원광 중국 진나라 금릉으로 건너가 불교와 유학을 공부함 |
활동 시기/일시 | 581년 - 원광 경전 강론과 대중 교화 활동으로 명성을 얻음 |
활동 시기/일시 | 589년 - 원광 수나라에서 섭론종을 배우고 연구 |
활동 시기/일시 | 600년 - 원광 진평왕의 요청으로 신라에 옴 |
활동 시기/일시 | 601년 - 원광 가실사에서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전함 |
활동 시기/일시 | 607년 - 원광 경주 황룡사에 주석 |
활동 시기/일시 | 616년 - 원광 궁중에 출입하면서 정치 현안에 대해 자문 |
몰년시기/일시 | 630년 - 원광 황룡사에서 입적 |
출생지 | 원광 출생지 - 경상북도 경주시 |
학교|수학지 | 원광 수학지 - 중국 진나라 금릉[강소성 남경] |
활동지 | 가실사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
활동지 | 황룡사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20-1 |
활동지 | 금곡사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
성격 | 승려 |
성별 | 남 |
[정의]
삼국 시대 청도의 가실사에 머물렀던 신라의 승려.
[개설]
원광(圓光)[547∼630]의 성은 박씨(朴氏)로 경상북도 경주시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630년 황룡사에서 입적하였다. 청도의 가실사(加悉寺)에 머물던 601년(진평왕 23)경 귀산(貴山)과 추항(帚項)이 가실사로 찾아와 계명(誡銘)을 구하자, ‘화랑도의 세속 오계(世俗五戒)’를 전해주었다.
[활동 사항]
원광의 생애와 활동이 어떠했는지는 여러모로 혼란스럽고 불확실하다. 원광에 관한 기록들이 서로 다른 점이 많고, 같은 문헌 내에서도 상호 모순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그동안 복원되지 못하고 있던 원광의 생애가 최근 연구자 이문기에 의하여 그 대강이 복원되었다. 연구자 스스로가 ‘시론(試論)’이라고 하나, 기존 연구 중에서 가장 진전된 연구라고 판단되므로, 이문기의 연구 결과를 중심으로 원광의 생애와 활동을 살펴보았다.
원광은 어린 나이에 유학을 배우다가 559년(진흥왕 20)에 출가하여 불법을 익히는 한편 유학 공부도 계속했다. 571년(진흥왕 32) 진(陳)의 서울 금릉에 가서 약 5년 간 유학과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성실론(成實論)』·『열반경(涅槃經)』 등 불교 교학을 연구하였다. 576년 오(吳)나라의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서 약 6년 동안 『아함경(阿含經)』을 연구하고 선(禪)을 수행하였다.
581년 호구산에서 내려와 『성실론』과 『열반경』을 강론했으며, 587년에는 회향사(廻向寺)에서 『성실론』을 강론하였다. 이와 같은 강론과 대중 교화 활동을 통하여 원광은 이 무렵 이미 크게 명성을 떨쳤다. 588년 말 또는 589년 초에 난병(亂兵)에 의해 위기에 처했다가 수(隋)나라 장수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곤경에서 벗어나서, 수나라의 서울인 대흥(大興)으로 옮겨 섭론종(攝論宗)을 연구했으며, 이후 대략 11년 동안 불법 수행과 연구로 중국에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드디어 원광의 명성이 신라에까지 알려지자 600년(진평왕 22) 진평왕이 귀국을 요청하였으므로 황제의 허락을 받고 조빙사(朝聘使) 제문(諸文)과 횡천(橫川)을 따라 귀국했으며, 귀국 직후 청도의 가실사(加悉寺)에 머물렀다. 601년(진평왕 23)경 귀산(貴山)과 추항(帚項)이 가실사로 찾아와 계명(誡銘)을 구하자 그들에게 유명한 ‘화랑도의 세속 오계(世俗五戒)’를 전해주었다. 602년(진평왕 24) 원광으로부터 세속오계를 받은 귀산과 추항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포상 과정에서 스승인 원광의 명성이 더욱더 높아졌다. 가실사에 머무는 동안[600∼607년 무렵] 불교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수계(授戒)와 참회로써 깨우치고자 점찰보(占察寶)를 만들고 정기적인 점찰 법회(占察法會)를 가졌으며, 진평왕의 병을 고쳐주어 신임이 더욱 돈독해졌다.
607년(진평왕 29)경에 경주로 와서 황룡사에 주석했으며, 이후 입적할 때까지 해마다 두 차례씩 법회를 개최하였다. 608년(진평왕 30)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을 걱정한 왕이 원광에게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도록 요청하는 글을 지어달라고 하자,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수나라 양제(煬帝)에게 보냈다. 613년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왔을 때 황룡사에서 인왕백고좌(仁王百高座) 법회가 열렸는데, 원광이 상수(上首)로서 불경을 강설했다. 616년(진평왕 38) 이후 궁중을 출입하며 정치 현안에 대해 자문해 주었으며, 630년(진평왕 52) 계를 남기고 황룡사에서 단정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원광의 저술로는 『여래장경사기(如來藏經私記)』 3권과 『여래장경소(如來藏經疏)』 1권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저서를 통해서 볼 때 원광이 여래장 사상에 조예가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원광은 신라 승려로서 대승 불교를 깊이 연구하여 신라에서 강의한 초창기 불교사의 대표적 학승이기도 했으며, 미신적 사유에 바탕하고 있던 주술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불교 사상의 토착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원광은 대승 불교의 호국 불교 사상을 화랑도 및 근왕 사상(勤王思想)과 연결시켜 국가 이념으로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묘소]
『삼국유사』에는 원광의 사리를 모신 부도가 명활성 서쪽에 있는 삼기산 금곡사(金谷寺)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소재 금곡사지에 있는 폐탑이 바로 원광의 부도라는 설도 있으나, 탑의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약간 의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