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1014
한자 近代 敎育
영어공식명칭 Modern Education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임흥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철원지역에서 행해진 근대교육

[정의]

강원도 철원에서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근대적 교육기관에서 이루어진 교육.

[1880년대 구한말]

1.향교

향교는 공립학교의 성격을 띤 중등 정도의 교육기관으로 지방재정에 의하여 설치되고 유지되는 학교였다. 향교는 선왕과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 유생을 대상으로 강학하는 교육 기능, 향토 사회의 문화 발전과 향풍을 순화하는 사회교육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철원 지역에는 철원향교가 있었고, 김화 지역의 김화향교, 금성 지역의 금성향교, 평강 지역의 평강향교가 있었다.

2.서원

서원은 민간에 의해 설치 운영되었던 사학 기관으로 ‘선현 존경과 후진 장학’이라는 지표 아래 명유[이름난 선비]와 공신을 숭배하고, 청년 자제를 모아 학문과 덕행을 연마하는 교육기관이었다. 이후 학문 발전의 기능과 함께 파벌과 당쟁을 격화시키는 역할을 해 온 서원은 조선 19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철원 지역에 있던 서원으로는 포충사가 있었고, 김화 지역의 충열사·충장사, 평강 지역의 산앙재영당이 있었다.

철원 지역의 향교와 서원은 1880년대 이후 명맥을 유지하였던 교육기관으로서의 의의는 있으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극히 미약하였으며, 더욱이 근대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까지 철원에는 근대적 교육기관이 설립되지 않아 근대 교육은 일제의 식민 지배 하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일제 강점기]

1.공립학교

가.소학교·보통학교

개항기에 들면서 정부는 근대적인 교육정책의 이행을 위해 1895년 고종의 칙서로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고 1895년 4월부터 각종 학교 관제와 규칙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철원에는 1899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에 공립 철원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이후 일제 식민지 시대 통감부의 지배 아래 1906년 「보통학교령」이 제정되면서 그동안 소학교로 불리던 초등학교의 명칭을 보통학교로 바꾸었는데 1913년 철원에는 4년제 철원공립보통학교[4학급, 학생 152명], 김화공립보통학교[3학급, 학생 100명], 금성공립보통학교[4학급, 학생 154명], 평강공립보통학교[1학급, 학생 76명] 등 4개의 공립학교와 일제의 식민지 경제 수탈을 돕는 요원을 양성하는 실업학교인 1년제 철원보통학교 병설 철원간이농업학교[1학급, 학생수 4명]가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이후 1941년까지 철원군에 12개 교, 김화군에 21개 교, 평강군에 15개 교의 보통학교가 운영되었다.

나. 중학교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1941년 4월 철원공립중학교가 5년제 학교로 학년당 1학급, 총 5학급의 규모로 설립되었다. 교직원은 4명으로 모두 일본인이었으며 개교 당시 한국인 30명, 일본인 25명이 입학하였다.

2.사립교육기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교육에 대항하기 위한 민족적 노력은 사립학교 교육으로 나타났다. 사립학교는 민간인이 설립한 학교로 신문화 교육을 통한 건국 정신과 민족정신 함양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1909년에서 1936년까지 철원 지역에서 설립되어 운영되었던 사립 교육기관은 사립학교 7개 교[봉명학교·배영학교·정의학교·신창학교·창신학교·창흥학교·창동학교], 야학교 2개교[근로야학교·김화야학교], 학원 2개원[명천학원·구창학원], 사숙 2개 교[관동의숙·기린사숙], 간이학교인 동막간이학교 등 14개 학교이다.

3. 일어보급소 및 각종 양성소

일본제국주의는 민족교육을 억제하는 한편 식민 통치를 위한 기능인을 양성하고 경제적 수탈과 착취를 위한 요원을 양성하기 위하여 일어보급소를 설치하였다. 일어보급소는 일본 헌병과 순사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철원 지역에 4개 소[지포리·토성리·사창리·지하리], 김화 지역에 3개 소[산양리·방천리·답거리], 금성 지역에 2개 소[당현리·창도리], 평강 지역에 1개 소[험석리]에서 165명의 정원으로 운영되었다. 이 밖에 식민 경제 요원 확보를 목적으로 여성 공장 직공 양성을 위한 잠업전습소 등을 설치 운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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