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695 |
---|---|
한자 | 南宮墀妻河東鄭氏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기승 |
[정의]
조선 후기 도봉 지역에 살았던 효부.
[개설]
도봉구 쌍문동(雙門洞)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그 가운데 조선 시대의 효자 남궁지(南宮墀)와 그의 처 하동정씨(河洞鄭氏), 그리고 그의 아들인 남궁조(南宮鋽)까지 정문을 받은 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계]
『함열 남궁씨 족보』에 따르면 남궁지의 부인 정씨는 본관이 하동(河東)으로 부정(副正)을 지낸 정노성(鄭老星)의 딸이다. 남궁지의 첫 번째 부인으로 3남 1녀를 낳았다.
[활동 사항]
하동정씨는 어려서부터 착실하여 부모의 말씀을 잘 따랐다. 출가할 때는 의장과 경대를 하인이 돌아가는 길에 친정으로 돌려보내며 “나는 이미 출가외인이 되었으니 어찌 친정의 물건을 탐내어 부모 공양에 손색을 입게 하리요.” 하였다. 시댁에서도 효도와 우애를 갖추어 행동했다. 시아버지 남궁도(南宮燾)가 2년간 병환으로 아무 것도 먹지 못했는데 마침 정씨가 해산을 했다. 정씨는 아기를 남에게 맡기고 시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먹이면서 간호했다.
[묘소]
하동정씨는 세상을 떠난 후 쌍문리(雙門里) 남쪽 기슭에 남편과 함께 합장되었다. 1967년 현재의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도락산에 있는 문중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양주에 살던 진사 이회종(李會鍾) 등이 남궁지 부부와 아들을 위한 정문(旌門)을 내려줄 것을 예조에 청원하자 예조에서 1893년(고종 30) 10월 입안(立案)했다. 같은 해 12월 16일 동부승지(同副承旨)였던 이석영(李石榮)이 그 내용을 고종에게 아뢰자 고종이 정문을 내리고 정씨를 영인(令人)으로 추증(追贈)했다. 또한 정문을 지을 때 목재와 목수는 국가에서 지원할 것, 그리고 그 자손의 호세(戶稅)와 여러 잡역을 면제해 주라는 명도 함께 내렸다. 현재 정문은 1995년 11월 12일에 복원한 것으로,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에 있는 함열 남궁씨 승지공파 도봉 문중회 선산의 도락재(道樂齋) 재실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