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7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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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小仙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나영 |
출생 시기/일시 | 1929년 12월 30일 - 이소선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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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0년 11월 13일 - 전태일 분신 자살 |
활동 시기/일시 | 1970년 11월 27일 - 이소선 청계 피복 노동조합 결성, 고문 추대 |
몰년 시기/일시 | 2011년 9월 3일 - 이소선 졸 |
출생지 | 이소선 출생지 - 경상북도 달성군 성서면 감천리 |
거주|이주지 | 이소선 거주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
묘소 | 이소선 묘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606-1 모란공원 |
성격 | 노동 운동가 |
성별 | 여 |
본관 | 광주(廣州) |
대표 경력 | 전국 민주화 운동 유가족 협의회 회장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살았던 노동 운동 지도자.
[개설]
이소선(李小仙)은 장남인 전태일(全泰壹)이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 시장에서 분신자살한 이후, 아들의 유지를 이어 한국 노동 운동의 대모(大母)로 활동한 노동 운동가이다. 특히 1986년에는 전국 민주화 운동 유가족 협의회를 설립하고 1993년까지 회장을 맡는 등 노동 운동 지원 활동을 벌였다.
[가계]
이소선은 1929년 경상북도 달성군 성서면 감천리에서 아버지 이성조와 어머니 김분이 사이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3년 경 아버지 이성조는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학살되었고, 본인은 1945년 늦봄 정신대로 끌려갔다가 탈출해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7년 전상수와 혼인하여 장남 전태일 등 2남 2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이소선은 1964년 단신으로 상경하였다. 이 무렵 장남 전태일은 청계천 평화 시장에서 미싱사·재단사 등으로 일하며 노동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전태일은 1969년과 1970년 각각 ‘바보회’와 ‘삼동 친목회’ 등을 결성하여 「근로 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으나, 회사 측과 정부의 무시로 번번이 좌절을 겪어야 했다. 그러던 중 1970년 11월 13일 「근로 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다가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르며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는 구호를 외치며 자결하였다.
이소선은 당시 전태일의 임종을 지켰는데, 전태일은 마지막으로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라는 부탁을 남겼다고 한다. 전태일의 장례식은 쉽게 치를 수가 없었다. 이소선은 전태일이 생전에 주장했던 청계 피복 노동조합 결성 지원, 정기 건강 진단, 일요일 휴무 보장 등을 요구하며, 아들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아들의 시체를 인수할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이소선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20일 만에 장례를 치렀으며, 11월 27일 청계 피복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
이후 이소선은 노동 운동가로서 치열하게 활동했다. 1971년 겨울, 동화 상가에 후생 식당을 열어, 노동자를 위해 국수를 삶는 일에 종사하기 시작한 것을 비롯하여, 1973년에는 청계 피복 노조 노동 교실을 설립하여 인근 노동자들의 배움터를 마련하였고, 노동 교실의 실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노동 교실을 탄압하려는 사측과 경찰의 폭력에 맞서 투쟁을 벌였다. 이 운동은 긴급 조치 9호의 위세에 눌려 침체 상태에 빠져 있던 각계 민주 세력에게 큰 활력소가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청계 피복 노조를 둘러싼 정부의 탄압과 저항은 반복되었고, 이 과정에서 이소선도 두 차례나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다. 1985년에는 민주화 실천 가족 운동 협의회를 설립하여 공동 의장으로 추대되었고, 다시 1986년에는 전국 민주화 운동 유가족 협의회를 창립하여 1993년까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89년에는 유가족 협의회 회원들과 함께 135일 동안 의문사 진상 규명 농성을 벌였고, 1998년에는 의문사 진상 규명 및 명예 회복법 제정을 위한 422일 천막 농성을 진행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전국 해고자 협의회 지원 운동 등을 주도하면서 재야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전태일이 분신할 당시 이소선과 함께 거주했던 곳이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56번지였다. 이후로도 이소선은 아들 내외와 함께 쌍문동에서 거주하였으며, 2011년 9월 3일 도봉구 쌍문동 한일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민주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른 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의 모란 공원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4월 18일 사월 혁명 연구소 주최의 사월 혁명상을 수상하였다. 2012년에는 이소선의 일대기를 다룬 태준식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어머니」가 개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