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382
한자 鷺梁院/露梁院
이칭/별칭 노량원(露梁院)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차인배

[정의]

조선 시대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설치되었던 숙박 시설.

[개설]

노량원은 조선 시대 도성과 한강 이남지역을 연결해주는 주요 나루인 노량진(鷺梁津) 인근에 위치했던 일종의 여관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시대에는 주요 도로에 역참(驛站)과 역원(驛院)을 설치하였다. 조선 초기 전국에는 41개의 주요 도로와 540여 개소의 역(驛), 1300여 개의 원(院)이 운영되었다. 역원은 주로 교통의 요지, 특히 나루터나 다리 주변에 위치한 경우가 많았다. 원은 원래 공무로 인한 여행객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한 용도로 설치되었기 때문에 이용에 극히 제한이 있었고, 양란 후에는 거의 피폐되는 곳이 많았다. 원의 운영을 민간업자가 위탁받아 대행하는 경우도 생겨났으며, 민간이 개설하여 운영하는 주막, 여관, 점(店) 등이 원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기(京畿), 과천현(果川縣),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 3년조에 노량원 관련 기록이 있다.

[내용]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기 과천현 조에는 노량진의 남쪽 언덕에 노량원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역원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노량원의 설치 연대, 규모와 운영 양상 등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없지만, 인덕원(仁德院)-미륵원(彌勒院)-오금원(吾金院)-요광원(要光院)으로 연계되는 경기도 과천현의 주요 역로의 시발점 역할을 하였다.

[변천]

『승정원일기』 영조 3년[1727년] 기사에 따르면 성균관 중수를 위해 노량원 사우를 훼철한 재목 15칸을 옮겨 사용했다는 내용을 보면 그 규모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위의 기록만으로 노량원이 당시 철폐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조선 후기 노량진의 통행량이 오히려 늘어나면서 나루 주변에는 장시가 열리고 여행객의 편의를 위한 숙박시설들도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노량진 나루터 인근에 설치된 노량원은 인덕원-미륵원-오금원-요광원 등의 과천의 주요 역로의 시발점이라는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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