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방조제
-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행정구역. 전라관찰사를 지낸 이서구(李書九)가 광활간척지를 가리켜 ‘구구지간 광활만인지지(九區之間廣闊萬人之地)’라고 했듯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고 넓다는 뜻에서 광활(廣活)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 김제군 진봉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49년 8월 15일 진봉면의 광활한 간척지를 갈라서 광활면을 신설하고 옥포리(玉浦里)·은파리(銀波里)·창제리(蒼提里)...
-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은파리·옥포리·창제리에 있는 방조제. 광활방조제는 1924년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일대 동진강으로 밀려드는 조수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동진농업주식회사가 건립하였다. 1924년 준공되어 다른 곳과 함께 국가관리결정을 받았는데, 1952년 9월 폭풍우로 제방 일부가 유실되어 구제방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1966년 6월 주민 부담으로 복구되어 같은 부분 238....
-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강제적인 이주가 아닌 자발적인 이민의 경우 생존 경제와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은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광활방조제를 막으며 개발된 간척지이다. 염기(鹽氣)[소금기]가 가득한 갯땅을 전국에서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염기를 제거하고 농사가 가능한 땅으로 만들었다. 해방 후 광활은 이민자들의...
-
1952년 9월 4일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광활방조제가 무너져서 논이 물에 잠기자 주민들은 농토를 되찾기 위해 공사를 추진했다. 방조제가 터졌을 당시 논에는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동공업사를 축으로 각 지역에서 인력을 동원하여 방조제를 수리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일단 신작로를 기준으로 둑을 막았다. 빠른 시간 안에 공사를 시작해서인지 둑이 무너진 후...
-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밀려드는 조수(潮水)의 해를 막기 위해 만든 제방. 방조제는 해면 간척지에서 바다로부터 농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쌓는데 간척 전공사비의 50~70%를 차지하며 간척지의 생명선이 된다. 축제선(築堤線)은 지반의 고저 및 양부(良否)·조위(潮位)·풍향·인접지의 배수 계통 등을 고려하여 단위 면적당의 제방 연장이 최소로 되도록 선정한다. 방조제의 구조는 지반의 상태,...
-
화양마을 주민들의 생활은 방조제 안쪽 농토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논보다 방조제 너머 끝없이 펼쳐진 갯벌에 나가 짠 바닷물과 갯흙을 밟는 시간이 많았다. 쇠스랑처럼 생긴 기구를 이용하여 갯벌을 헤집고, 그물이나 낚시를 던져 걷어 올린 것은 짱뚝[방조제]을 거치면 생활이 되었고, 집으로 들어오면 생계가 되었다. 화양마을 주민에게 갯벌은 황금밭이 되고,...
-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에 속하는 법정리. 조선 말기 만경군 하이도면에 속했던 갯벌 지역으로, 간척하여 진봉면 고사리에 편입하였다. 1949년 진봉면에서 광활면을 분할하고 옥포리라 명명하여 김제군 광활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가 되었다. 옥포리가 속한 광활면은 1924년 동진농조주식회사가 광활방조제를 만들어 조성한...
-
1910년 한일병합으로부터 1945년 8·15 해방에 이르는 기간의 전라북도 김제 지역의 역사. 한일병합은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가 일제 침략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강제 편입된 사건으로 경술국치(庚戌國恥) 또는 일제병탄(日帝倂呑)이라고도 한다.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에 이르기까지 한민족 말살 정책과 식민지 수탈 정...
-
광활방조제가 완공된 이후 화양마을은 물론이고 광활면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방조제 관리였다. 광활방조제는 일본인 후쿠이가 관할하면서 2년 넘게 공들여 만든 것으로, 광활면의 너른 땅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바로 이 광활방조제였다. 그래서 광활방조제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철저한 감독 아래 지속적인 관리를 받아 왔다. 9일에 한 번씩 9개 답구에서 순번...
-
광활간척지 조성 사업은 1925년 일본 재벌 아베 후사지로[阿部房次郎]가 자기 자본 백만 엔과 일본 정부 자본 백만 엔으로 김제에 동진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공사를 위해 일본 정부는 당시 참모본부에 있던 육군 대좌 후쿠이를 책임자로 불러들였다. 단기간에 많은 인력이 필요한 공사였기에 한국 사람은 물론이고, 중국인들도 1천 명에 가까이 동원되었고, 일본에...
-
광활방조제가 터지면서 큰 수해 피해가 났던 때는, 한국전쟁으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봇짐을 들고 피난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게 피난민은 낯선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 역시 팔도에서 이민을 통해 들어온 각성받이들이기에 거주민, 이주민을 구분하지 않았다. 급하게 피난을 온 사람들을 위해 마을에서는 생필품과 식량을 나눠 주면서 동네 사람으로, 이웃사촌으로 따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