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C010101 |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경숙 |
[구암리 4개 마을의 유래]
공음면 구암리는 본래 무장군 동음치면에 속해 있었는데,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해서 ‘구암(龜岩)’이라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을 새롭게 고치면서 동음치면 덕음리(德音里)ㆍ구수리(九水里)ㆍ장동리(壯洞里) 전체와 성재리(聖才里)ㆍ다옥리(多玉里) 일부, 하리면(下里面) 택동리(宅洞里)와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면(弘農面) 덕림리(德林里) 일부를 병합하여 구암리(龜岩里)라 하였으며, 이때부터 고창군 공음면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구암리는 마래(馬來)ㆍ구수(九水)ㆍ장동(壯洞)ㆍ다옥(多玉)의 4개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동(壯洞)ㆍ이심동ㆍ마래ㆍ성재동ㆍ다옥ㆍ구격ㆍ용흥ㆍ구수(九水) 등 8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동쪽으로 신대리와 칠암리, 서쪽으로 국도 77호선을 경계로 하여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읍 단덕리, 남쪽으로 석교리, 북쪽으로 두암리와 상하면 용대리와 마주하고 있다.
마래마을은 1600년대 경주최씨가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다가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꿈에 도인이 나타나 터를 잡아 주어 형성되었다고 한다. 또한 장동마을은 1800년대 인접한 석교마을에 살던 금성나씨가 이주해 와 마을을 이루었고, 구수마을은 1700년대 중반에 형성되었는데 저수 시설이 없을 때 아홉 방향에서 물이 흘러 구시내로 불리다가 뒤에 구수내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 다옥마을은 1800년대 해풍김씨가 들어와 형성되었다. 2010년 3월 말 현재 구암리의 면적은 약 4,21㎢이며, 총 127가구에 259명[남자 123명, 여자 136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포고문을 발포한 곳]
구암리 구수마을은 마을 앞에 큰 당산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당산(堂山)’, 또는 ‘당뫼’로도 불렸다. 그런데 1980년대 도로를 확장하면서 당산나무를 베어 버렸다고 마을 주민 전윤오 씨가 아쉬움을 토로했다.
“팽나무였는디, 아마도 수령이 300년은 되었을 것이여. 도로 확장하면서 베어 버렸는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쉬워. 당산나무 밑에는 입석도 있었는디 그것도 도로 밑에다 파묻었을 것이여. 파 보면 나올 것인디. 크기가 7자[약 2.1m]에서 8자[약 2.4m] 정도였어. 당산제도 지내고 입석에 줄도 감고 그랬는디.”
특히 구수마을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 등 동학 농민군이 지역 단위의 민란에서 전국 단위의 봉기로 전환되는 시발점이 되는 포고문을 발포[1894년 음력 3월 20일]한 곳으로,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당시 무장현 동음치면]로서 의미가 있다. 구수마을 앞에는 자그마한 공원이 하나 조성되어 있는데, 동학농민혁명의 무장기포지로 밝혀져 그 현장에 기념탑을 세우고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기념공원’으로 만든 것이다.
전윤오[1938년생] 씨는 “여기가 달리 기포지로 선정이 되었겄어? 여기가 장소가 될 만한께 그랬것제…….”라며 어른 팔로 두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들이 마을에 많았다고 전해 준다. 현재는 왕버들 두 그루만 남아 있지만, 나무들이 많았을 때는 그늘에서 쉬기도 하고 일도 하면서 마을 공동체 공간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기념탑 근처에도 꽤 큰 소나무가 남아 있었는데 기념탑을 세우면서부터 소나무가 시들시들해지더니 결국 죽고 말았단다. 마을 사람들은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을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그 소나무를 살리기 위해 막걸리도 약으로 부어 주고, 퇴비도 주고, 수간 주사도 놓아 주었지만 말라 죽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나마 기념공원 조성 사업을 하면서 소나무 세 그루를 그곳에 심어 놓아 마을 사람들의 아쉬움을 달래 주고 있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