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0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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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愍懷嬪姜氏 |
영어음역 | Concubine Gang |
이칭/별칭 | 강빈(姜嬪),소현세자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삼조 |
성격 | 세자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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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
성별 | 여 |
생년 | 1611년(광해군 3) |
몰년 | 1646년(인조 24) |
본관 | 금천 |
대표관직 | 세자빈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세자빈.
[가계]
본관은 금천. 강감찬의 19세손이며, 아버지는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이다.
[활동사항]
민회빈 강씨는 1627년(인조 15) 소현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며, 1637년(인조 15)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에 볼모로 갔다가 1645년 귀국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심관(瀋館)에서 국왕의 대리자로서 많은 재량권을 행사하였고 청측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소현세자가 귀국하자 인조는 세자에게 전위를 강요당하거나 세자 대신 입조의 요구를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세자는 환국 후 두 달 만에, 병증이 있은 지 3일 만에 34세의 나이로 급서하였다.
세자의 독살 혐의가 짙은데도 인조는 입관을 서두르고 강빈과 대신들의 간청도 뿌리치고 장례를 매우 간소하게 지냈다. 세자가 인조의 미움을 받다가 죽자 시강원 제신들의 조문도 받지 못하고, 세자의 장지와 장일 문제에도 관여하지 못하였다. 세자가 죽으면 마땅히 세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인조는 이를 무시하고 차자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다음 왕위 계승자로 삼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평소 사이가 나쁘면서 인조의 총애를 받는 소의(昭儀) 조씨의 모함이 크게 작용하였다.
또한 1646년에는 임금의 수라상에 독을 넣은 사건이 일어나자 강빈이 그 소행의 장본인으로 모함을 받고 시비도 가리기 전에 후원 별당에 감금되었다. 측근에 있던 궁녀들이 불복하면서 무참한 죽음을 당하고, 조신들도 일제히 일어나 통렬히 그 불가함을 역설했으나 끝내 사사되고 말았다. 이어 후환을 막기 위해 친정어머니와 네 형제도 처형되거나 고문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빈의 처벌에 반대했는데, 이응시·홍무적 등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효종이 즉위하고 김자점 등이 처형당한 뒤에도, 강빈의 옥사는 원손을 제치고 세자로 책봉된 효종의 왕통에 저촉되는 일이어서 논의가 금지되었다. 1654년(효종 5)에 황해도관찰사 김홍욱(金弘郁)이 소를 올려 신원을 건의하였지만, 사실이 옳게 밝혀지면 종통의 소재가 남은 아들 이석견에게 돌아가게 되므로 효종은 이를 묵살하고 오히려 김홍욱을 죄인으로 몰아 장살하였다.
1676년(숙종 2)에는 승려 처경(處瓊)이 왜릉화지(倭菱花紙)에 언문으로 소현세자의 유복자라는 내용의 글을 써서 강빈의 필적으로 속여 허적(許積)에게 보였다가 거짓임이 탄로나 처형당하였다. 효종·숙종 연간의 복잡하게 전개되던 중앙 정계의 정치에 참여한 신명규가 적은 『묵재기문록(默齋記聞錄)』에 강빈 옥사의 내용이 실려 있다.
[상훈과 추모]
1717년(숙종 43)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발의로 신원이 되었으며, 민회빈(愍懷嬪)으로 봉해졌다. 또한 아버지 강석기를 비롯하여 홍무적 등 관련 피화자들이 모두 복관 및 증직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산141-20번지에 있으며, 영회원(永懷園) 또는 아왕릉(兒王陵)이라 불린다. 사적 제357호로 지정되었으며, 지정 면적은 2,182㎡이다. 묘의 시설은 봉분,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석양(石羊), 석호(石虎), 문인석(文人石), 석마(石馬) 등이 있으나 비석과 정자각(丁字閣)은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