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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268
한자 壬辰倭亂
영어의미역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준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3년 6월연표보기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경상남도 하동군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왜적이 수십만이라는 많은 군사력으로 부산에 침입하여 이후 7년간 벌어진 전쟁으로, 여기에는 조선군 이외에 명나라 군대도 동원되어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전쟁으로 전개되었다.

[경과]

1. 진주성 싸움

1592년 4월 왜적은 수십만이라는 많은 군사력으로 부산에 침입하였다. 14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을 위시한 왜군 제1진은 부산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그 뒤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양산·밀양·대구를 거쳐 서울로 향하였다. 19일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을 대장으로 한 제2진이 부산에 상륙하고 경주를 거쳐 영천·신령 방면으로 향하였으며, 같은 날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휘하의 제3진이 김해에 상륙한 뒤 창원을 점령하고 성주·개령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향하였다. 이후 제9진까지 왜병들이 속속 우리 해안에 상륙하여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초기 단계에서 왜병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지 않은 경상남도 서부 지역에서는 곽재우(郭再祐) 등의 의병 활동을 위시하여 여기저기에서 의병이 편성되어 왜병이 경상남도 서부 및 호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이후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 이전까지는 비교적 왜적으로 인한 피해가 적었다. 제1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면서 인근 고을이 분탕질 당하던 시기까지도 하동은 왜적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 시기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조·명 연합군이 평양을 수복한 이후 전체적인 전세의 불리, 도처에서의 의병들의 공격 등으로 인한 군량미 보급의 곤란 때문에 왜병들은 부산·김해 등지의 해안가로 남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명나라와 강화 교섭을 벌이게 되면서, 이 틈을 타서 진주성을 재차 공격하게 된 것이다.

1차 진주성 전투 때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동원을 진주성을 공격하던 왜적은 인근 고을에도 침입해 분탕질하였는데, 하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진주성이 함락된 이후 왜적은 호남 지역을 점령하려고 하였지만, 조선군의 결사적인 저항과 명군의 군사적·외교적 견제로 남해안의 점거지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2. 왜군의 공세와 이순신의 활약

이후 지지부진하던 강화 교섭이 결렬되면서 왜적의 대대적인 침입이 다시 시작되었다.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조정에서는 산성 중심의 방어 및 청야전(淸野戰)의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1597년 4~5월 사이에 왜적은 거제·안골포·가덕도 등을 장악하고 김해·창원·함안·진주·고성·사천·곤양 등지를 왕래하면서 작전의 전개 지역을 확대하고 있었다.

왜군은 8월 상순 육군을 좌·우군으로 나누고 경상좌우도의 요충지인 진주와 전라도 방어의 핵인 남원 및 그 보장(寶藏)인 전주를 차례로 공략하였다. 왜 수군도 남해안에 상륙하거나 섬진강을 거슬러 남원 공략에 나섰다. 좌군은 고성·사천·하동을 거쳐 전주로 향하였다. 우군은 밀양·초계를 거치거나 김해·창원을 거쳐 진주로 향하였다. 8월 15일 남원성은 적에게 함락되었고 이어 전주까지 점령당하였다.

그러나 조·명 연합군의 방어로 왜적은 서울로의 북상을 저지당하였다. 게다가 재차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李舜臣)의 활약으로 왜 수군이 격파당하고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조·명 연합군의 뒤이은 총공격으로 왜적은 남동쪽으로 밀려 경상좌도의 울산·양산·동래와 경상우도의 김해·창원·웅천·고성·거제·진주·곤양·남해·사천 그리고 전라좌도의 순천 등지를 점거하고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전투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 죽자 왜병은 점차 철수하게 된다. 순천을 점령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도 시마즈 요시히로[島眞義弘]의 함대가 이순신, 진린의 연합 함대와 전투하는 틈을 타서 부산으로 도망하였다. 이렇게 하여 임진왜란을 막을 내리게 된다.

[결과 및 의의]

1593년 6월경부터는 진주와 하동 근처가 왜적이 전라도로 침략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기 때문에 왜적들이 자주 드나들게 되고 오랫동안 침탈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에 화개를 거쳐 지리산 계곡까지도 왜적의 분탕질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침략에 대응해 제1차 진주성 전투 때 하동의 일부 군사도 진주와 함안의 경계에 있는 부다현에 배치되어 왜적을 입구에서 막는 역할을 했지만, 왜적의 대대적인 공략으로 이렇다 할 방어를 하지 못하고 흩어져버렸다. 그러나 하동 인물로 최기필(崔琦弼)은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가솔을 이끌고 성에 들어가 저항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또 곤양[현재 하동군 금남면] 출신 정기룡(鄭起龍)은 왜적과의 여러 전투에서 거의 승리를 거두어 육지의 이순신으로 일컬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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