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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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鑑錄逆謀事件 |
영어의미역 | Conspiracy of Prophecies of J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용국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정감록(鄭鑑錄)』을 사상적 틀로 이용하여 역모를 도모한 사건.
[역사적 배경]
17세기 이후 양반 지배층 사이의 권력 다툼이 더욱 심해지자 숙종 때에는 붕당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정국(政局)이 자주 바뀌었다.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이 실패하자 그 가담 세력들 중 많은 이가 지리산으로 몸을 피하였으며, 정조의 친정 체제 확립 과정에서 홍국영(洪國榮)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하동의 문양해(文洋海)가 주도한 『정감록』 역모 사건이 홍국영 등 홍씨 일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농업 생산력의 발달로 인한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은 사회 계층의 분화를 촉진하였으며, 장시가 발전하여 사회 여론의 장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사회 변혁을 도모하거나 왕조를 부정하고 새 왕조 건설을 염원하는 세력들이 여러 가지 비기(祕記)·도참설(圖讖說)을 퍼뜨렸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면 『정감록』은 1739년(영조 15) 5월 15일에 처음 나타난다. 영조(英祖)가 선정전(宣政殿)에서 대신·비국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한 자리에서 “정감록이 어떤 책이냐”고 묻자 좌참찬(左參贊) 조현명(趙顯命)이 “참서(讖書)·비기 종류입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승정원일기』 제1577책, 1785년(정조 9) 2월 29일의 기록을 보면 이인(異人)이 등장하는데 실록의 내용으로 보아 한 사람으로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 이인은 도술이 신통광대(神通廣大)하여 능히 천리 밖의 일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인의 말 중에서 “조선은 기운이 다하여 비록 금년이 약간 풍년이나 명년(明年)에 도적이 크게 일어나 도로가 불통할 것이다. 재명년(再明年)에 세상을 바꾸는 거사가 일어날 것이다. … 또 가로대 나인즉 이미 복지(卜地) 하동 선장촌(先場村)에 집을 지어 경영한 지가 오래인데, 차후의 세계는 무귀천(無貴賤)일 것이니 이것을 마땅한 사업으로 삼아 새로운 세상을 열어 시조가 되자 … 끝내 그 이인의 명자(名字)와 소위 이인이라는 자의 성명을 말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 주목된다.
지리산은 삼국 시대부터 신성한 곳으로서 중사(中祀)의 대상이었으며, 고려 시대 이인로(李仁老)[1152~1220] 이후 이상향인 청학동이 존재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졌던 곳이다. 그리하여 사회 변혁 세력들이 지리산을 구체적 구원의 장소로서, 이상향을 실현할 곳으로서 주목하였다. 『정감록』과 같은 비기가 나돌고, 숙종 대 이후 성행하기 시작하는 미륵 세상의 갈망에서 본다면 지리산은 더 없는 사회 변혁 세력의 의지처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하동의 화개는 그중에서도 중심 무대였다.
[경과]
1. 홍씨 일가와 관련
『정조실록(正祖實錄)』 권 19, 1785년 3월 23일 기사를 보면 정조는 “옥사의 정상을 엄격히 비밀에 붙여 일일이 공개하지 않았으나 서울과 지방에서 나라에 대하여 원망하는 무리들을 모집한 것은 곧 홍가였고, 만여 냥의 은화(銀貨)를 낸 것은 바로 홍가였다. 누구는 대장이고, 누구는 원수이고, 3월에 군사를 일으킨다는 말 또한 홍복영(洪福榮)의 공초(供招)에 있다. 이런즉 전후하여 소란을 일으키는 말들이 모두 뜻을 잃은 한 불령(不逞)한 무리들에서 나왔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명백하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정조는 하동의 문양해가 『정감록』에 의지하여 새로운 세상을 획책한 사건의 모든 발단은 홍국영 등 홍씨 일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1782년 진천의 이경래(李京來)·문인방(文仁邦) 『정감록』 역모 사건, 1785년 문양해·이율(李瑮)의 하동 지역 『정감록』 역모 사건이 일어나자 정조가 여러 도의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들에게 비밀리에 유시(諭示)하였던 것을 보면 그만큼 『정감록』이 미칠 사회적 파장을 최소화하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정조는 “민심의 동요가 하루아침, 하룻저녁의 연고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제1577책, 1785년 2월 29일의 기록을 보면 “1784년 소설(騷說)이 낭자(狼藉)하여 대소민인(大小民人)이 다투어 지리산 아래로 피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하였으며, 같은 책 3월 10일의 기록에서도 “전설이 낭자하고 떠들썩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아 지리산은 달아나 도망한 자의 소굴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으로 하동의 『정감록』 역모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2. 정조의 친국
1785년 2월 29일 전 현감 김이용(金履容)이 상변하여 문양해·이율·양형(梁衡)·홍복영·주형채(朱亨采)·김두공(金斗恭)이 관련된 역모 사건이 알려졌는데, 이날 정조는 숙장문(肅章門)에 나아가 김이용과 이율·양형을 직접 심문하였다. 이 사건의 실상은 『정조실록』 권 19, 1785년 2월 29일, 3월 8일, 3월 16일조, 『승정원일기』 제1577책, 1785년 2월 29일조, 그리고 「정조대왕 행장」 등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이들 기록에서 지리산 이인에 관한 내용이 가장 상세한 것은 『승정원일기』이지만 『정조실록』에도 그 인물을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두 기록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가 지리산이라는 구체적 지명이 역모 사건에 자주 언급되고 있음에 비해서 후자는 그렇지 않고 주로 중앙의 인물과 관련한 죄상을 밝히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1785년 3월 12일 홍복영은 공초에서 1781년 문양해와 4, 5차례 서신을 주고받았다고 했으며, 홍국영은 공초에서 “작년[1784년] 10월에 과연 홍복영을 만났는데, 을사년[1785년] 3, 4월 사이에 군사를 일으킨다는 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하동의 『정감록』 역모 사건에게 가담했던 주요 인물들은 1781년을 전후하여 서로 교유하면서 현실의 정치적 문제를 공유하고, 『정감록』·『진정비결(眞淨秘訣)』·『국조편년(國朝編年)』의 내용을 그들의 거사에 활용하여 동조자를 모으거나 세력화를 기도했던 것이다.
문광겸과 양형의 공초의 내용을 종합하면 『국조편년』은 왕조의 멸망 과정을 연대순으로 묶은 책인데, 1785년[을사] 봄 수재가 들어 임주(林州)와 옥구(沃溝) 사이가 물에 몇 자 깊이로 잠기고, 1787년[정미] 곤양(昆陽)과 고성(固城) 사이에 수재가 있고, 1788년[무신]에는 북방의 도적이 크게 일어나서 집을 부수고 절간을 허물어도 관군이 능히 대적하지 못하며, 1789년[기유]에 마땅히 비참한 흉년이 들며, 1790년[경술]과 1791년[신해] 사이에는 들에 푸른 풀이 없어지며, 1792년[임자]부터 1807년[정묘]까지 연달아 병란(兵亂)이 있은 후 세 나라로 갈라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1785년 3월 16일 문광겸은 공초에서 “우리나라는 600년이 지난 뒤에 100년간 전쟁이 있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진정비결』과 『정감록』은 서로 맞아 떨어진다고 하였으며, 이른바 세 집이라는 것은 곧 정가(鄭哥)·김가(金哥)·유가(劉哥)인데, 100년 동안 전쟁을 하더라도 우리들 생전에는 그럴 염려가 없을 것 같다”라고 하고, “유가·김가·정가 세 사람이 장차 셋으로 갈라져 일어나서, 아침에는 화해하고 저녁에는 싸운다는 말을 산인(山人)에게서 들었는데, 이것은 바로 『정감록비기(鄭鑑錄秘記)』 가운데 있는 말입니다”라고 하였다.
3. 문양해의 무귀천 세상
문양해는 지리산 쌍계 골짜기 깊은 곳에 하천산당(荷川山堂)을 짓고 두문불출하였으며, 지리산 선원(仙苑)의 이인들로부터 선술(仙術)과 술법을 배웠다고 한다. 지리산 선원의 이인은 향악(香嶽)으로 불린 김호(金灝), 징담(澄潭)으로 불린 고경명(高輕明), 노선생(老先生)으로 불린 이현성(李玄晟), 일양자(一陽子)로 불린 모문룡(茅文龍)인데, 문양해 등은 지리산 선원의 이인들이 『국조편년』·『진정비결』·『정감록』 같은 예언서를 직접 인용하거나 해석해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지리산 선원의 이인들은 『정감록』 역모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공초 과정이나 수색을 통해서 끝내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던 가공의 인물들이었다.
홍복영에 가담한 중앙 세력은 이율·양형 등이고, 하동의 화개에서는 문양해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조가 문양해를 직접 심문하여 ‘그의 신상, 사건에 결탁한 도당, 거사할 날짜, 군사를 일으킬 장소, 거사 자금, 무기의 출처, 중앙과 지방의 구체적인 협력 세력의 규모 등’을 알아내고자 했던 것에서도 그가 하동의 『정감록』 역모 사건의 주도적인 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1781년부터 문양해는 홍복영과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구체적인 피난과 근거지로 삼을 곳을 하동의 화개로 정했던 것 같다. 문양해는 1783년[계묘] 공주로부터 하동으로 이사한 것으로 나온다. 이때부터 문양해의 아버지 문광겸은 홍복영으로부터 거금을 받아 하동 선장촌을 건설하게 된다. 지리산권은 일찍이 이상향 청학동의 소재처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들이 실제 18세기 이후 피지배층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비례하여 크게 유행하던 미륵신앙과 『정감록』의 사상이 합해져서 환상의 구원처로서 이상향인 선원(仙苑)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문양해 등은 선장을 근거지로 하여 자금을 모으고 인물을 모아 무귀천의 새로운 세상을 마땅한 사업으로 하여 그들이 새로운 세상의 시조가 되자고 하였던 것이다. 하동의 화개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획책하는 자들이 차후 세계는 귀천이 없는 평등세상을 만들자면서 의거지로 삼았던 곳이었다.
[결과]
문양해 등은 1785년 2월 29일 김이용의 고변으로 말미암아 혁명적인 무귀천의 이상향 건설에 실패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사건이 드러나면서 포도청에 갇힌 여러 죄수의 절반이 하동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3월 23일 정조는 크게 놀란 하동 사람들을 깨우쳐서 진정시키도록 수령들에게 지시하였으며, 4월 1일 하동의 『정감록』 역모 사건을 마무리 짓는 포상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의의와 평가]
하동의 화개 지역을 포함하는 지리산은 1728년 무신란을 기점으로 지방 세력과 토호 세력 및 신흥 상인 계층이 지리산 이인의 예와 같은 하나의 구심점 아래 혁명의 공간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정감록』 역모 사건에 등장하는 선원은 지리산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현실을 탈출할 수 있는 구원처로서 이상향의 의미로 인식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사건은 무귀천의 이상 사회 구현을 목표로 『정감록』을 사상적 틀로 이용하여 동조 세력을 규합하고 거사 추진을 주동했다는 점에서 민이 주도한 체제 변혁 운동의 한 유형으로 규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