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2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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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漆浦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칠서면|칠북면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
집필자 | 안홍좌 |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과 칠서면, 칠북면에 걸쳐 있던 초기 국가 시대의 소국.
[개설]
함안군 칠원 광려천 주변에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군과 취락지 등이 있으며, 가야의 유적들도 확인되고 있다. 특히 오곡리 유적(梧谷里遺蹟)은 이른 시기부터 칠원 지역에 정치 집단이 있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광려천 주변 들판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좋은 여건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칠포국(漆浦國)은 칠원 지역의 농업 생산력과 낙동강 및 마산만을 이용한 인근 지역과의 교역을 통해 성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오곡리 유적에 가야의 널무덤과 구덩식 돌덧널무덤, 돌방무덤이 있고 함안을 대표하는 화염문 투창 고배가 다량 부장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형성 및 변천]
칠포국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초기 기록을 신뢰한다면 3세기 포상팔국(浦上八國) 전쟁 기사에 칠포국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그 이전에 성립되었을 것이다. 다만 인근 골포국(骨浦國)[현 창원 분지 지역으로 추정]이나 창원 다호리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 집단의 형성과 관련성을 생각해 볼 때 칠포국의 형성은 늦어도 기원후 2세기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칠포국이 두 차례 포상팔국 전쟁에 모두 참여하고 있는 점을 보면, 칠포국은 포상팔국 중에서도 유력한 정치 집단이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두 차례의 전쟁이 모두 실패로 끝남으로써 칠포국은 쇠퇴하게 되고, 5세기 이후부터는 현재 함안 가야 지역으로 비정되는 안라국[아라가야]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칠원 전 지역이 함안 권역에 포함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칠서면의 안기 고분군에서는 창녕계 토기로 분류되는 굽 모양 꼭지를 가진 뚜껑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정약용의 『강역고(疆域考)』 변진 별고(弁辰別考)에 포상팔국을 정의하면서 "칠포(漆浦)는 지금의 칠원"이라고 비정하는 구절이 있다. 포상팔국과 칠포가 포구라는 의미가 있어 바다에서 먼 칠원을 칠포국이라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고려 시대 귀산포(龜山浦)가 있던 현재 창원시 합포구 구산면이 칠원현 소속이었다는 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칠원 읍지(漆原邑誌)』의 칠원 토산품에 바다에서 나는 '대구·청어·소금' 등이 포함된 점, 마산만에서 13.5㎞나 떨어진 칠원면 유원리 조개더미에서 '참굴·대합' 등의 바닷조개 껍데기가 나오는 점 등은 칠원이 바다와 깊은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당시 칠포국은 현재 칠원 지역을 근거지로 하였으며, 구산면 인근 해안 지역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권48 물계자전에 "포상팔국이 함께 모의하여 아라국(阿羅)을 침입하므로 아라가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니 왕이 왕손 날음으로 하여금 군(郡)과 6부군(六部軍)을 이끌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3년 뒤에 골포·칠포·고사포의 삼국인이 갈화성을 공격하므로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구원하니 삼국의 군대가 대패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같은 내용의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 물계자전에도 나온다. 또한 정약용의 『강역고』 변진 별고에 "포상팔국으로 이르는 골포는 지금의 창원에 합쳐지고, 칠포는 지금의 칠원이며"라는 구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