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1355
한자 咸安 落火- 饗宴
이칭/별칭 줄불 놀이,이수정 낙화 놀이,함안 읍성 낙화 놀이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집필자 김길섭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괴항 마을무진정 앞에서 4월 초파일에 열리는 민속놀이.

[개설]

함안 낙화 놀이함안면 괴산리 괴항 마을무진정(無盡亭) 앞에 위치한 연못인 이수정(二水亭) 일원에서 매년 4월 초파일에 열리는 민속놀이이다. 이를 줄불 놀이, 이수정 낙화 놀이. 함안 읍성 낙화 놀이 등이라고도 한다. 함안 낙화 놀이는 조선선조 때 함안 군수로 부임한 한강(寒岡)정구(鄭逑)[1543∼1620]가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선 후기에 함안 군수를 지낸 오횡묵(吳宖默)[1834~?]의 『함안총쇄록(咸安叢鎖錄)』에도 낙화 놀이에 대한 기록이 이어지고 있어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었다가 1980년대 초부터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괴항 마을 쳥년회에서 복원하였고, 이후 함안면에서 '낙화 놀이 보존 위원회'를 구성하여 현재까지 행사를 이어 오고 있다. 오늘날 함안군에서 열리는 낙화 놀이는 함안 군민들의 단합심을 고취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에게도 함안의 아름다움을 추억으로 남기는 행사로서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봄밤의 아름다운 꽃 잔치, 함안 낙화 놀이]

봄은 언제 어디서나 꽃으로 향연(饗宴)을 베풀어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지천으로 핀 꽃의 잔치에 많은 사람들은 나들이를 서두르며 추억 쌓기에 바쁘다. 이런 아름다운 봄 잔치에 우리의 발길을 유혹하는 또 하나의 꽃놀이가 있으니, 바로 까맣게 물든 봄밤에 빨갛게 불꽃을 피워내는 함안 낙화 놀이이다. 이제 갓 물이 오르기 시작한 왕버들의 연초록 잎들과 무진정 앞의 3,300㎡에 달하는 연못인 이수정의 물빛에 어우러지는 수천 개의 낙화(落火)는 환상 그 자체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에 실려 산산이 흩어지고, 바람이 자면 함박눈이 내리듯 고요히 떨어져 내리는 불꽃의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한꺼번에 빼앗으며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봄밤의 또 다른 꽃 잔치, 매년 사월 초파일에 열리는 함안 낙화 놀이의 세계로 떠나 보자.

[함안 낙화 놀이의 준비 과정과 불꽃의 향연]

봄밤, 불꽃의 향연으로 보는 이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함안 낙화 놀이지만 그것을 준비하는 시간은 인고(忍苦)의 과정이다. 모든 잔치가 그것을 준비하는 많은 사람들의 땀에서 비롯된 것임이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기능 보유자인 김현규에 따르면 낙화 놀이의 준비 작업은 낙화의 재료, 즉 숯을 만드는 일에서 시작된다. 당해에 사용되는 숯은 보통 그 전해에 만들어 놓는데, 그 숯을 만드는 작업도 쉽지 않다. 먼저 굵은 참나무를 산에서 1톤 정도 베어 와 숯가마에 넣고 일주일 동안 불을 때어 숯을 만든다. 숯을 만드는 과정은 참나무 벌목부터 운반, 그리고 불을 관리하는 일까지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이 힘든 작업 중의 하나이다.

숯이 만들어지면 이 숯을 잘게 빻아 고운 가루로 만들고 길이 40㎝, 폭 3㎝ 정도의 한지와 광목, 노끈, 철사 등을 준비한 뒤 낙화 놀이의 주재료인 낙화봉을 만든다. 낙화봉을 만드는 과정은 먼저 한지를 바닥에 깔고 곱게 간 참나무 숯가루를 한 숟가락 고르게 편다. 펴 놓은 숯 위에 심지 역할을 하는 광목을 놓고 그 광목 위에 다시 숯가루를 고르게 편다. 그런 다음 한지를 돌돌 말아 숯을 감싸고, 똑같이 만든 또 하나의 한지와 함께 꽈배기 모양으로 꼰 다음 아랫부분은 노끈으로 감아 마무리하고 윗부분은 철사를 감아 마무리한다. 완성된 낙화봉의 크기는 두께 1~1.5㎝, 길이 15~20㎝ 정도이다.

낙화봉이 다 만들어지면 무진정 앞의 이수정에 낙화봉을 매달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과 기둥을 철사로 연결하는 작업이 이어진다. 낙화 놀이가 열릴 초파일이면 이수정 연못에서는 또 하나의 위태롭고도 힘겨운 작업이 벌어진다. 이 작업은 이수정 연못에 작은 뗏목과 배를 띄우고, 그 배에서 2인 1조로 하나하나의 낙화봉을 철사에 매다는 일이다. 작은 뗏목과 배 위에서 한 사람은 노를 저으며 배의 균형을 잡고, 다른 한 사람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낙화봉을 철사에 매달아야 한다. 전체 5개 조, 10명으로 구성된 인원이 2,500~3,000개의 낙화봉을 매다는 작업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흔들리는 물결 위에서 벌이는 일이라 더욱 힘들 수밖에 없다.

낙화봉을 매다는 작업이 다 끝나고 관광객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면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다.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나면 드디어 불꽃의 향연이 시작된다. 불꽃의 시작도 역시 힘겨운 과정이다. 이수정을 빙 둘러 매달아 놓은 2,500~3,000개의 낙화봉에 또 일일이 불을 붙이는 작업이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위태롭게 불을 붙이는 30여 분의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봄밤을 밝히는 낙화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난다. 잔잔한 이슬비처럼, 소담스러운 함박눈처럼 고요하게 내리다가 바람이라도 휙 불면 바람따라 휙 날리는 불꽃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하늘을 향해 올랐다 화려하게 떨어지는 불꽃놀이가 분수와 같은 아름다움이라면, 처음부터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면서 바람에 흩날리는 낙화 놀이는 폭포와 같은 아름다움이다. 그렇게 낙화의 불꽃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환상의 불꽃 폭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불꽃 앞에 서 본 사람들은 평생 잊히지 않을 추억을 마음속에 담아 간다. 그것이 함안 낙화 놀이가 아름다운 이유이다.

[함안 낙화 놀이의 유래]

함안 지역 고유의 민속놀이로 한지에 참나무 숯가루를 넣어 만든 낙화봉을 줄에 매달아 불을 지펴 불꽃을 날리는 함안 낙화 놀이는 그 유래가 정확히 전하여지지는 않는다. 지역 사람들에 의하면 기록으로 남겨지기 훨씬 이전의 시기부터 함안 지역에서 행해진 놀이라고 한다. 다만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문헌에 따르면 17세기 조선 중엽부터 유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선조 때 함안 군수로 부임한 한강정구가 군민(郡民)의 안녕(安寧)을 기원하는 뜻에서 이 불꽃놀이를 시작했다고 한다.

오횡묵이 1889년(고종 26)에서 1893년(고종 30)까지 4년 동안 함안 군수로 근무하면서 기록한 『함안총쇄록』에 따르면 낙화 놀이는 함안 읍성 전체에서 행해져 인근 산 위에서 불꽃을 구경할 정도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오횡묵이 남긴 시 중 한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찬란한 산호 같은 등불의 장이 이날 열리니

한 성의 화기가 사람을 뒤따라서 오는구나

붉은빛은 꽃이 피어 봄이 머무는 듯하고

밝음은 별무더기 같아 밤은 돌아오지 않네

혹 바람이 불어 흐르는 불빛을 성글게 하더라도

달이야 무슨 상관있어 한 점 구름을 싫어하리요

은혜에 젖어 지난날에 기이한 상도 많이 받았으니

멀리서 장안의 대궐을 바라보노라

함안 군수를 지내면서 자신의 모든 행적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함안총쇄록』을 지은 오횡묵이 남긴 시를 보면 함안의 낙화 놀이가 얼마나 장관이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낙화 놀이에서 떨어지는 불꽃의 아름다움을 ‘찬란한 산호 같은 등불의 장’이 열려 그 ‘붉은빛은 꽃이 핀 것 같다’고 하였다.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의 마음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면 함안 낙화 놀이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장관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러나 이런 유구한 전통을 지닌 함안 낙화 놀이도 우리 민족의 시련과 함께 그 운명의 부침(浮沈)을 겪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의 민족 정기 말살 정책에 따라 중단되었고, 6·25 전쟁 이후의 힘겨운 시기에도 그 명맥은 숨죽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들어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괴항 마을 청년회의 노력으로 복원되어 매년 4월 초파일 무진정 앞 이수정에서 다시 열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 함안 면민을 중심으로 함안 낙화 놀이 보존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2008년 경상남도 무형 문화재 제33호로 지정[2008년 10월 30일]되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함안 낙화 놀이의 무대 이수정과 무진정]

함안 낙화 놀이의 무대인 이수정은 공식 명칭으로 무진정이다. 무진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조삼(趙參)[1473~?]이 후진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 지은 정자라고 한다. 조삼은 1489년(성종 20) 17세에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507년(중종 2)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함양(咸陽), 창원(昌原), 대구(大邱), 성주(星州), 상주(尙州) 등의 목사(牧使)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이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겸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지냈다.

무진정의 건립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조삼이 지은 것이라는 설과, 또 다른 하나는 조삼의 후손들이 그의 덕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우고, 그의 호를 따서 무진정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앞 설의 근거로는 1542년 6월 여름, 풍기 군수를 지낸 신재(愼齋)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지은 무진정의 기문(記文)이 있다. 그 기문에 "삼도(三島)의 자주빛 비취색 같은 좋은 경치와 통하고 십주(十州)의 노을빛보다 낫다.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고 밝은 달이 먼저 이르니 반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온갖 경치가 모두 모여 진실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라 하겠다."라고 하여 무진정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이런 사정을 볼 때 무진정은 조삼이 고향으로 내려와 후진을 양성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정자인데, 이후 쇠락한 것을 후손들이 다시 중수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함안 사람들은 무진정 앞의 연못을 일컬어 이수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일부 함안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원래 함안에는 일수정, 이수정, 삼수정이 있었는데 근처에 신작로를 만들면서 일수정과 삼수정은 사라지고 이수정만 남았다고 한다. 연못 가운데 누각은 영송루(迎送樓)이다.

이 이수정을 달리 충노담(忠奴潭)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연못가에 서 있는 충노 대갑지비(忠奴大甲之碑)와 관련된 것이다. 함안 조씨 문중에 전해져 오는 기록과 비문을 참고하면 충노 대갑지비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묘호란 당시 노비 대갑이 주인 조계선(趙繼先)[?~1627]을 모시고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조계선이 전사하게 되자 대갑은 주인과 함께 죽는 것이 옳으나 고향에 주인의 죽음을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멀고 먼 의주에서 본가 근처에 이르러 조계선의 부음을 전하고는 "혼자 살면 어찌 면목이 있겠습니까. 주인을 난에서 구출하지 못하여 집에 갈 면목이 없습니다." 하고 지금의 검암천(儉岩川)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충노 대갑지비 옆으로는 부자 쌍절각(父子雙節閣)이 있다. 이 쌍절각은 조삼의 증손인 조준남(趙俊男)[?~1597]과 그의 아들 조계선의 효와 충을 기려 세운 전각이다. 조준남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이 쳐들어와 증조부 조삼의 묘를 파헤치자 왜적들을 뚫고 들어가 흙으로 관을 덮고 저항하였다. 왜적이 그를 위협하자 조준남은 "네놈들이 내 선조의 묘소를 무단 훼손하니 너희는 나의 불공대천의 원수다."라고 분노하며 자결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조계선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1627년 정묘호란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출전하였다가 의주에서 전사하였다.

함안 낙화 놀이는 그 행사가 열리는 무대인 무진정의 의미부터 남다르다. 선비로서의 최고의 덕목이었던 효와 충을 실천하고자 목숨을 바친 부자(父子)의 정신과, 비록 신분 제도의 유물이기는 하나 자신이 섬기던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대갑의 충성심까지 무진정함안 낙화 놀이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어둠 속에 빛나는 불꽃에 몇백 년 전의 충혼이 함께 타오른다.

[꼭 한번 가 봐야 할 여행지 함안]

낙화 놀이의 아름다움이 깃든 고장 함안, 이 함안에는 나라를 지켜 온 선비 정신이 수려한 자연에 어리어 있다. 학문 수양의 산실이었던 서원(書院)과 강호한정(江湖閑情)의 소산인 누정(樓亭)을 둘러보는 여정은 삶의 현실에 매몰된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는 촉매제가 될 것이며, 봄밤을 아름답게 수놓는 함안 낙화 놀이는 세상살이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것이다. 다음 봄날에는 꼭 한번 함안으로 나들이를 해 보자. 낙화 놀이가 열리는 무진정 뒤쪽으로는 옛날에 축성한 사적 제67호 성산산성(城山山城)이 있고, 앞쪽 함안천 건너에는 보물 제71호인 함안 대산리 석조 삼존상(石造三尊像)이 있으니 함안 낙화 놀이에 앞서 둘러보면 또 하나의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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