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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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銅器時代 |
영어공식명칭 | Bronze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윤호필 |
[정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청동기나 간석기를 제작하여 사용하던 시대.
[개설]
청동기시대는 덴마크의 고고학자 톰센(C. J. Thomsen)이 도구의 재질에 따라 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의 3시대로 구분한 것 가운데 하나로, 인류의 물질문화 발전 단계에서 청동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 시대를 말한다. 청동은 인류가 처음으로 도구 재료로 사용한 금속이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청동기시대가 없이 석기시대에서 바로 철기시대로 이어졌다는 ‘금석병용기론(金石倂用期論)’이 제기되었지만 여러 유적의 발굴을 통해 잘못된 주장임을 확인하였다. 이후 많은 유적발굴과 연구를 통해 대략 기원전 1,500년 전에서 기원전 300년 무렵까지의 시기를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청동도구도 사용하였지만 간석기도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청동기시대 문화]
청동기시대의 시기 구분은 크게 전기·중기·후기의 세 단계로 나누어지며,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대규모 마을의 형성, 다양한 농경 활동 및 대규모 경작지 조성, 거대한 무덤인 고인돌의 축조, 거석기념물 축조, 의례 활동의 증가 등이 일어난다. 이는 사회적 위계화 및 복합도가 증가하는 것으로 고대 국가로 나아가는 기틀이 되었다. 대표적인 문화상을 보면, 청동기는 비파형 동검과 세형동검, 조문경과 다뉴세문경, 토기는 생활용기로서 문양을 시문하지 않은 민무늬토기[無文土器]가 주가 되며, 무덤에 부장하는 토기로서 적색마연토기와 가지문토기가 만들어진다. 간석기는 보습과 돌칼·갈판·돌낫·돌도끼·석착 등 농구류 및 공구류가 주를 이루며 이와 함께 가공된 목제 도구들도 활발히 만들어진다. 돌검(석검)과 돌화살촉(석촉)은 무기 및 사냥용으로 사용되었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 유적은 다른 지역에 비해 적은 10곳 정도이다. 대부분 유물산포지, 고인돌, 선돌 등이며, 이 중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도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를 이해하기에는 자료가 매우 부족한 편이다. 취락과 관련하여 주거지가 조사된 곳은 신안리유적 1곳으로 말각장방형의 수혈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이 외에는 대부분 지표조사나 시·발굴조사에서 생활유물의 채집을 통해 대략 추정된다. 취락은 대부분 강변 충적지와 구릉사면에 입지하는 특징이 있다. 무덤유적은 주로 고인돌이 확인되었으며, 신안리유적에서 석관묘 2기가 조사된 바가 있다. 고인돌은 화산리 고인돌과 손곡리 고인돌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모두 묘역시설을 갖추고 있는 고인돌로서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다. 화산리 1호 고인돌의 경우 상석은 150x100x25㎝ 정도인 데 비해 묘역의 규모는 길이 29m, 폭 6.6m 정도로 이 일대에서 가장 큰 대규모이다. 화산리 고인돌과 손곡리 고인돌 이외에 확인된 다수의 고인돌은 개석식 고인돌이다. 거석기념물로는 선돌(立石)이 3곳 정도 확인된다. 선돌은 긴 형태의 돌을 땅에 세운 것을 말한다. 입석의 기능은 크게 지역수호신·풍요기원신·묘역수호신 등의 의례적 기능과 경계·교통로 표지석 등의 이정표 기능이 있으며, 이는 입석의 설치위치나 입지에 따라 그 의미가 부여된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을 살펴볼 때 주로 강변과 구릉에서 생활하였으며, 고인돌과 선돌을 축조하면서 다양한 삶을 영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거대 고인돌과 선돌의 축조는 집단의 위계화, 복합화, 상호교류를 나타내는 증거로서 자료는 부족하지만 서부 경상남도 내륙지역 청동기시대 문화양상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