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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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物流- 大動脈, 嶺南大路- 京釜線 鐵道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정석태 |
[정의]
조선시대 경상남도 밀양에서 한양까지 잇는 간선도로와 근대 초기에 건설된 경부선 철도.
[영남대로의 옛길과 경부선 철도의 개통]
영남대로는 조선시대에 한양을 중심으로 남동 방향으로 처음에는 마산, 나중에는 동래를 기착지로 하는 간선도로였다. 영남대로는 북서 방향으로 의주를 기착지로 하는 서로(西路), 북동 방향으로 서수라를 기착지로 하는 북로(北路), 남서 방향으로 해남을 기착지로 하는 삼남로(三南路)와 함께 전국을 X형으로 연결하는 조선시대 4대 간선도로 중 하나였다. 조선시대 영남 지역의 인적, 물적 자원을 한양으로 이동시키는 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한양의 문화를 지역에 전파하여 지역 문화를 발전시키는 통로로써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도로였다. 더구나 영남대로의 기착지에서부터 다시 해로로 일본과 교류하였기 때문에 영남대로는 통신사가 왕래하는 통로이자 임진왜란 당시 왜군 제1군이 진격한 통로였으며, 따라서 군사적, 외교적 측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도로였다.
근대에 일본에 의하여 동래 부산포가 개항장이 되면서 영남대로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 지배와 수탈을 공고히 하고 만주를 통한 대륙으로의 진출을 가속화하기 위한 철도 건설을 서둘렀다. 1905년 부산에서부터 경성까지 경부선 철도를 개통하고, 1906년 다시 경성에서부터 신의주까지 경의선 철도를 개통하였다. 그리고 1911년 압록강철교를 개통하여 만주를 통한 대륙으로의 진출을 가속화하게 되었다.
특히 부산에서 경성까지 경부선 철도를 개통하는 과정에는 영남대로 역도(驛道)에 주목하게 되었다. 철도가 건설되는 지역의 영남대로 역도를 그대로 활용하여 철도를 건설하면, 이미 노반이 잘 다져져 있어서 철로를 놓기가 쉬워 공사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데다, 당시 일본의 통제하에 있던 조선의 국유지 역도를 무상으로 활용하여 경비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게다가 철도가 건설되는 지역의 주민들, 양반 사족들의 전답과 임야가 대부분인 지역의 주민들과 불필요한 대립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1905년 개통한 단선 경부선 철도, 그중 부산 초량에서부터 경산까지 구간은 영남대로 역도를 상당 부분 그대로 활용하여 건설하였다. 후일 경부선의 복선화와 KTX 운행으로 단선 경부선 철도의 옛 노선이나 터널 등이 버려져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게 되었다. 이 때문에 도리어 밀양에는 버려진 단선 경부선 철도의 옛 노선이나 터널 등을 통하여 조선시대 영남대로 옛길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적지 않다.
밀양은 조선시대에는 영남대로의 교통 요충지로서 번영을 구가하였고, 근대에는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된 이후 또다시 근대 철도교통의 요충지로서 발전하였다. 더욱이 1905년 진해의 군항을 연결하는 삼랑진에서 마산까지 마산선이 함께 개통되면서 1905년 영업을 개시한 밀양역과 삼랑진역, 1906년 영업을 개시한 유천역과 낙동강역, 그리고 무인 신호소 미전역의 다섯 개 역이 있어서 전국에서 가장 철도역을 많이 가진 도시가 되었다. 지금도 철교, 터널, 관사, 급수탑, 통신소 등 근대 철도 관련 유적들이 곳곳에 있다.
[영남대로의 변천과 밀양]
영남대로는 신라 이래 개발되기 시작하여 고려가 건국한 뒤 수도 개경과 신라의 수도 경주를 연결하는 고려의 가장 중요한 간선도로가 되었다. 그 이후 고려를 지나 조선에 이르러서는 초기에 인재와 물산의 보고로써 영남이 중시되고, 또 그에 따른 개발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영남대로는 좌로(左路), 우로(右路), 중로(中路)의 세 노선을 갖게 되었다.
영남대로 좌로는 울산 염포에서 한양에 이르는 교통로였다. 경주, 영천, 군위, 의성, 안동, 풍기, 죽령, 단양, 청풍, 충주, 여주, 양평 등을 경유하였다. 단양에서 한양까지는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였다. 고려 초기부터 고려 후기 원나라의 일본 정벌 시기 전까지 영남대로 제1로였다. 우로는 웅천 내이포에서 한양에 이르는 교통로였다. 김해, 현풍, 성주, 김천, 추풍령, 영동, 청주, 죽산, 양재 등을 경유하였다. 고려 후기 원나라의 일본 정벌 시기 이후부터 1510년 왜관을 웅천에서 동래로 이설하기 전까지 영남대로 제1로였다.
중로는 동래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 사신들이 이용하였다.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인동, 선산, 상주, 유곡, 조령, 음성, 이천, 광주 등을 경유하였다. 1510년 이후의 영남대로 제1로에서 후일 널리 알려진 영남대로가 되었다.
조선 전기 밀양을 통과하던 영남대로 옛길은 지금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 밀양 북쪽 청도 경계까지의 영남대로 옛길과 남쪽 양산 경계까지의 영남대로 옛길을 대략 더듬어 보기는 어렵지 않다. 더구나 1905년 개통된 단선 경부선 철도 유적들이 곳곳에 산재해서, 영남대로 옛길을 더듬어 보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지금의 북성사거리에서 옥교산(玉轎山)을 좌측에 두고서 밀양향교를 지나 범북고개를 넘어 안인리[상동면] 쪽으로 현 경부선 철도를 따라 빈지소를 거쳐 옥산리[상동면]에 이르는 청도 경계까지에는 단선 경부선 철도 유천역이 된 조선시대 유천역(楡川驛) 유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빈지소 일원 강가 바위벼랑으로 난 길에서는 영남대로 옛길이 단선 경부선 철도 철로의 노반이 된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남루 아래 밀양교 우측에 있었던 밀양읍성 남문에서 삼문동, 가곡동, 남포리, 임천리를 지나 용성리 청룡터널에서 미전리 무월산터널[트윈터널]까지에는 청룡산터널 바깥쪽 밀양강 강가로 인전소[인굴이]에서 바위벼랑으로 난 영남대로 옛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무월산터널 위로 고개를 넘어 용전리 용전공단 앞쪽으로 가면 옛 무흘역(無訖驛)의 유지를 볼 수 있다. 그곳에서 삼랑진역을 거쳐 낙동강 따라가다가 검세리에 이르면 영남대로의 옛길 유적 중 밀양 처자교(密陽處子橋)가 있었다. 폭 4.5m, 길이 26m에 이르는 쌍무지개 형태의 대형 석조 다리로서 4대강 사업 과정에서 발굴되었지만 보존 관리가 어려워 땅속에 다시 묻어 놓았다. 여기서 좀 더 내려가 낙동강 가로 설치한 자전거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옛 밀양 작원관지(密陽鵲院關址)와 작원관지 옆 강가로 난 까치비리[작원잔도(鵲院棧道)]를 볼 수 있다.
[경부선 철도의 통로, 밀양 지역 근대 초기 유적과 그 흔적들]
근대 밀양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면서 1510년 영남대로가 통과한 이후 1592년 임진왜란 이전까지 80여 년 동안 누렸던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발전을 또 한 번 이루어 낸 도시가 되었다. 양잠과 산업 등이 성행하면서 한때 천석살림을 가지고서도 부자 소리를 듣지 못하는 곳이 밀양이었다. 이와 같은 기반 위에 문화적 욕구가 가득한 도시로서 전래의 유학만이 아니라 근대의 여러 분야에서 눈부신 활동을 한 많은 인물들을 낳았다.
이와 함께 근대 밀양의 경부선 철도는 경의선과 압록강철교로 연결되어 만주로 바로 진출할 수 있게 되면서, 일제강점기 밀양 출신 많은 독립지사들이 망명의 길을 떠나는 통로가 되었다. 그들은 철도로 압록강을 건너 망명하여 남만주, 북만주, 흑해 지역과 중국 전역으로 퍼져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다시 철도로 국내로 들어와 군자금의 모금과 독립운동에 종사할 인재를 모집하면서 활동하였다. 지배와 수탈을 용이하도록 만든 철도가 도리어 일제강점기 독립지사들이 중국과 우리나라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활동할 수 있는 주요한 통로가 된 것이다.
밀양 일원에는 근대 초기 철도 관련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것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유천역은 밀양시 상동면 옥산리 영남대로 옛 유천역 터에 건립되었던 역이다. 1906년 5월 15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고, 1945년 3월 경부선이 복선화되고 선로가 변경되면서 상동면 옥산리에서 금산리 현 상동역 자리로 이전하여 영업을 하였다. 2000년 1월 1일자로 역명을 유천역에서 상동역으로 변경하였으며, 현재 3급보통역으로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1945년 경부선 철도가 복선화되면서 이전까지 철도가 왕래하던 단선 경부선 철도의 철로와 터널 및 철교 흔적 등 여러 유적이 남아 있다. 그중 밀양 상동터널은 근대 주요 문화유산으로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유천역 앞 빈지소[유천유원지]는 경상남도의 주요 휴양지 중 하나로 주말이나 휴가철에 부산이나 대구에서 오는 특별열차가 운행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명소였다. 특히 옥산리 유천역 옛터에서부터 안인리에 이르는 길은 영남대로 옛길을 노반으로 하여 건설한 단선 경부선 철도의 여러 유적들이 있어서 밀양 지역 영남대로의 옛 모습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2. 용평터널[월연터널, 백송터널]에서 밀양역[2급 보통역, 가곡동]까지
용평터널은 밀양시 용평동에 있는 터널이다. 월연터널 또는 백송터널이라고도 한다. 월연정(月淵亭) 뒷산 아래를 뚫어서 만든 터널이다. 1905년 단선 경부선 철도의 터널로 출발하였다가 1945년 복선화 과정에 추화산의 다른 쪽으로 터널이 뚫리면서 현재는 차도로 활용되고 있다. 터널 길이는 약 300m이다. 용평터널 위쪽의 월연정, 월연정 앞쪽 강가와 그 주변 활성유원지는 한때 밀양과 밀양 인근 지역 사람들의 주요 휴양지로 사랑을 받았던 곳이다.
용평터널을 지나 밀양강 강가로 옛 철로가 놓여 있었고, 옛 철로 자리에서 밀양강철교를 지나 밀양역에 이르게 된다. 밀양강철교는 1903년 단선으로 하나가 놓였고, 1945년 복선화가 되면서 다시 하나가 더 놓여 지금은 두 개가 놓여 있다. 그중 지금 하행선으로 사용하는 위쪽에 놓인 철교는 1903년에 세운 것이고, 상행선으로 사용하는 아래쪽에 놓인 철교는 1945년에 세운 것이다. 밀양강철교를 건너며 바라보는 삼문동의 송림과 용두산 일원은 전국 사진작가들이 꼽는 아름다운 곳이다.
밀양역은 1905년 1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고, 지금은 KTX가 정차하는 2급보통역이다. 1962년 화재로 역사가 소실되면서 현재 옛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다만 경부선 개통과 함께 들어섰던 밀양역전 순사 주재소 건물과 가곡동 일원에 흩어져 있는 여러 흔적들을 통하여 밀양역이 가곡동에 위치하면서 한때는 번성했을 옛 모습을 그려볼 뿐이다. 밀양역에서 남포리를 거쳐 임천리로 나가면서 다시 영남대로 옛길을 노반을 활용한 단선 경부선 철도가 놓였다.
3. 청룡산터널[페터널]과 무월산터널[무흘산터널, 폐터널]
청룡산터널은 밀양시 삼랑진읍 용성리 현랑산 끝자락에 있는 터널이다. 1903년 단선 경부선 철도의 터널로 출발하였다가 1945년 복선화 과정에서 바로 아래쪽에 터널이 뚫리면서 폐터널이 되었다.
청룡산터널은 밀양역에서 남포리 아래쪽 광탄 위쪽의 임천터널을 지나 부림들, 칠성마을, 인굴이마을을 거쳐 현랑산 끝자락 인전소[인굴이]에 다다르면 만나게 되는 터널이다. 칠성마을과 인굴이마을을 거쳐 인전소에 이르는 길은 영남대로 옛길이면서 단선 경부선 철도가 놓였던 곳이다. 강가 가파른 산비탈에서 아래로 깊은 소를 끼고서 돌아가는 험한 길이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한 수령이 이곳 영남대로 옛길을 지나다가 두려움에 떨려 차고 있던 인장을 떨어뜨린 일이 있어서 산비탈 아래 깊은 소를 인전소라는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철로가 삼랑진역으로 가기 위하여 무월산터널[무흘산터널]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터널은 활처럼 둥그렇게 휘어져 있다. 길이는 약 150m 정도로 지금은 폐터널이 되었다.
청룡산터널을 지나 무월산[무흘산] 미전고개 아래로 뚫린 터널이 무월산터널이다. 무월산터널은 청룡산터널과 같은 1905년 단선 경부선 철도의 터널로 출발하였다. 1945년 복선화 이후에는 하행선 터널로 계속 사용되었고, 2004년 KTX 선로 직선화 과정에 새로 터널이 뚫리면서 폐터널이 되었다. 길이는 457m이다. 지금은 개인에게 불하되어 트윈터널로 이름을 바꾼 뒤 관람과 체험을 겸하게 하는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무월산터널을 빠져나오면 영남대로의 한 역인 무흘역이 있었다. 여기서 경부선은 삼랑진역으로 향하게 되고, 무인 신호소 미전역을 거쳐 미전선은 낙동강역으로 가서 경전선이 된다.
삼랑진역은 밀양시 삼랑진읍 송지리에 건립된 역이다. 1905년 1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고, 현재 2급 보통역으로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삼랑진역은 경부선의 경유역이자 경전선의 출발역으로 건설된 역이며, 역 구내와 역 일원에 근대 철도와 관련한 여러 유적들이 있다. 우선 역 구내에 있는 밀양 삼랑진역 급수탑은 1923년 세워진 근대 주요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2003년 1월 28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삼랑진역 일원 송지리에는 철도관사를 중심으로 조성되었던 근대 일본식 신시가지가 아직도 상당 부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옛 철도병원은 1986년 헐려 지금은 대형마트로 변하였고 신사는 원불교유치원으로 변하였으며, 많은 건물들이 필요에 의해 개조되었지만, 아직도 여러 건물들과 잘 정돈된 가로등이 시간을 1945년 해방 이전으로 되돌려 놓을 듯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삼랑진역 일원 송지리에 집단 거주하였던 일본인들은 낙동강 유역 삼각주 등에 과수농원을 조성하여 배 등의 과일을 생산하였으며, 경부선 철도를 통하여 멀리 만주의 일본 군대에 납품하였다고 한다. 삼랑진역을 지척에 두고 있던 송지리 버들섬유원지는 한때 서울의 광나루유원지나 뚝섬유원지와 같은 휴양지로서 주말이나 휴가철에는 부산이나 대구에서 오는 특별열차가 운행되는 명소였다.
삼랑진역을 출발하여 검세터널과 작원관터널을 지나면 양산으로 들어간다. 주변 영남대로의 밀양 작원관지와 작원잔도도 살펴볼 곳이다.
경전선 철도 낙동강역은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 삼랑진나루 앞 옛 후조창(後漕倉) 터에 건립된 역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1962년 준공한 복선 낙동강철교 앞쪽에 있었다. 1906년 12월 12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1962년 12월 20일 현재 공원으로 조성된 자리로 역사를 이전하여서 영업을 계속하다가 2004년 12월 10일 역원 무배치간이역이 된 다음 2010년 11월 12일 역사가 철거되었으며, 공원이 조성되었다.
현재 낙동강역에서 삼랑진역을 연결하는 경전선 선로가 단선으로 남아 있다. 1905년 단선으로 건설한 낙동강철교는 지금은 ‘삼랑진인도교’[일명 ‘콰이강의 다리’]라는 이름으로 인도 및 차도로 사용되고 있다. 1962년 복선으로 건설한 낙동강철교[996.6m]는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한강철교 다음으로 긴 철교였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레일바이크가 운행되고 있다.
낙동강역 주변의 조창[조창(漕倉), 후조창(後漕倉)과 통창(統倉) 등] 터와 삼랑진 옛 장터, 여흥민씨 민구령(閔九齡) 오형제의 우애가 빛나는 후포산(後浦山) 기슭의 오우정(五友亭)과 오우정나루, 뒷기미마을과 김정한(金廷漢)의 소설 「뒷기미나루」의 무대가 된 뒷기미나루 등도 함께 살펴볼 곳이다.
[영남대로 옛길과 근대 초기 경부선 철도 유적의 보존 필요성]
지금 밀양 주변의 밀양강과 낙동강 일원에는 가곡동에서부터 뒷기미나루를 지나 부산까지 밀양강과 낙동강 강가로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있다. 따라서 영남대로 옛길과 근대 초기 경부선 철도 관련 여러 유적들은 자전거로 돌아보는 데 어려움이 없다. 더구나 트윈터널로 개발한 무월산터널의 경우는 밀양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요사이 삼랑진 일대에는 주말이나 휴일에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관광도 겸하는 사람들로 몹시 붐빈다. 이와 관련하여 삼랑진 일대에 흩어져 있는 영남대로 옛길의 흔적과 단선 경부선 철도의 유적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현황 파악이 시급하다. 특히 근대 경부선 철도의 유적들은 철도관사의 경우처럼 개인 소유로 되어 원형이 훼손되거나 변형된 경우가 많다. 장기적인 보존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