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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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檍 |
영어공식명칭 | Hong Eok |
이칭/별칭 | 유직,정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철원 |
출생 시기/일시 | 1722년(경종 2) - 홍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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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53년(영조 29) - 홍억 알성문과에 장원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63년(영조 39) - 홍억 홍해로 유배 됨 |
활동 시기/일시 | 1765년(영조 41) - 홍억 부수찬에 기용|홍억 동지사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옴 |
활동 시기/일시 | 1766년(영조 42) - 홍억 부응교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768년(영조 44) - 홍억 보덕|집의 등을 거쳐 응교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771년(영조 47) - 홍억 강계부사로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72년(영조 48) - 홍억 대사간에 이어 형조참의로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76년(영조 52) - 홍억 탄핵 당함 |
활동 시기/일시 | 1778년(정조 2) - 홍억 대사간에 기용됨 |
활동 시기/일시 | 1789년(정조 13) - 홍억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파직 당함 |
활동 시기/일시 | 1790년(정조 14) - 홍억 대사헌이 된 뒤 내의원제조|한성부판윤|예조|형조|공조 판서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793년(정조 17) - 홍억 판의금부사에 이어 지경연사를 겸함 |
활동 시기/일시 | 1798년(정조 22) - 홍억 광주유부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04년(순조 4) - 홍억 의금부사가 된 뒤 지중추부사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809년(순조 9) - 홍억 사망 |
묘소|단소 | 홍억 묘소와 신도비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동교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남양 |
대표 관직 | 한성부판윤|공조판서|광주부유수|지중추부사 |
[정의]
조선 후기 세종 지역 출신의 문신.
[개설]
홍억(洪檍)[1722~1809]은 조선 후기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가계]
홍억의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홍숙(洪璛)이다. 아버지는 충청도관찰사 홍용조(洪龍祚)이며 어머니는 이창령(李昌岭)의 딸이다.
[활동 사항]
홍억은 1753년(영조 29)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평으로 관직에 나가 전적, 정언, 이조좌랑 등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장헌세자(莊獻世子)에게 극간(極諫)[임금이나 웃어름에게 잘못된 일이나 행동을 고치도록 온 힘을 다하여 말함]한 것이 문제가 되어 흥해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765년 부수찬에 기용되었다. 이어 병조번고어사(兵曹反庫御史)가 되어 훈련도감의 재고부상목(在庫腐傷木)을 군사들에게 상품으로 지급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1765년에 동지사의 서장관이 되어 정사 순의군(順義君) 이훤(李烜), 부사 김선행(金善行)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766년 부응교가 되었으며 암행어사로 강원도에 다녀와 탐욕이 많고 비루한 회양부사 김광국(金光國)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1768년 보덕·집의 등을 거쳐 응교가 되었으며 응제에 수석하여 대녹피(大鹿皮) 한 장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의주부윤이 되어 사상(私商) 가운데 범법자를 잡아 참형에 처하였다.
1771년 강계부사를 거쳐 이듬해 대사간에 이어 형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 대사간으로부터 강계부사 재직 시 탐학을 이유로 탄핵을 받고 충군(充軍)[군대에 편입시킴]되었다. 1787년 다시 대사간에 기용되었으며 1789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영남·호남 사이의 교통을 사사로이 차단하여 면포(綿布) 가격을 올린 죄로 파직당하였다.
1790년 대사헌이 된 뒤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 한성부판윤, 예조·형조·공조 등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793년 판의금부사에 이어 지경연사를 겸하였다. 1798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거쳐 1804년(순조 4) 지의금부사가 된 뒤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묘소]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동교리에 홍억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홍억의 신도비 비문은 홍석주가 짓고 이익회가 글씨를 썼으며 이지연이 전서를 썼다. 1822년(순조 22) 건립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