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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홍래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801
한자 宋鴻來
영어공식명칭 Song Hongrae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6년 5월 19일연표보기 - 송홍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 송홍래 파리 장서 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7월 29일 - 송홍래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 유예 2년 선고받음
몰년 시기/일시 1948년 2월 8일연표보기 - 송홍래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송홍래 건국 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2004년 10월 29일 - 송홍래 추모 백세각 항일 의적비 건립
출생지 송홍래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문덕로1길 33[문덕리 258]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송홍래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활동지 송홍래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919년 3월 파리 장서 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파리 장서 운동은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김창숙(金昌淑)을 비롯한 유림 대표들이 추진한 독립 청원 운동으로 제1차 유림단 의거라고도 한다.

[가계]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순익(順翊), 호는 회천(晦川). 고려 목종(穆宗) 때 간의대부(諫議大夫) 총부의랑(摠部議郞) 송맹영(宋孟英)의 후예이며, 조선 인조(仁祖) 때 만해정(晩悔亭) 송세빈(宋世彬)의 9세손이다. 아버지는 송인주(宋寅鑄)이다.

[활동 사항]

송홍래(宋鴻來)[1876~1948]는 1876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문덕로1길 33[문덕리 258]에서 태어났다.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1815~1900]와 이만영(李晩永)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문장(文章)과 필법(筆法)이 뛰어났으며, 특히 서예로 명성을 떨쳤다.

1919년 3.1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독립 선언문(獨立宣言文)이 발표되었으나 유림 측은 민족 대표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에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송준필(宋浚弼)·김창숙 등이 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 장서[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여 보내기로 하였다. 송홍래는 이때 작성한 파리 장서에 족친(族親) 송준필·송회근(宋晦根)·송인집(宋寅輯)·송규선(宋圭善) 등과 함께 한국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면서 항일 운동을 하였다. 파리 장서에서는 일제의 불법적인 한국 침탈 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민의 독립 의지와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파리 장서는 곽종석·김복한(金福漢)·송홍래 등 한국 유림 대표 137명이 서명했고, 파리 강화 회의로 보내기 위해 성주 유림의 김창숙이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지고 갔다. 그러나 프랑스까지 직접 가지는 못하고,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과 파리 강화 회의 의장에게 발송하였다. 동시에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하였다. 당시 성주 유림은 1919년 3월 29일 성주 백세각(百世閣)[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에서 송준필이 작성한 「국내 통고문(國內通告文)」을 인근 각 지역으로 배포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4월 2일의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도 준비하였다. 개신교 측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함께 참여하기로 하였다.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경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시장에 모인 3,000여 명의 군중이 독립 만세를 크게 외치며 만세 시위를 펼쳤다. 당황한 일본 군경이 총격을 가하여 이태희(李兌熙) 등 2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이봉희(李鳳熙) 등 7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일제 경찰은 만세 시위의 주동자들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파리 장서 운동의 기밀을 알게 되어 장서에 서명한 유생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송홍래도 파리 장서의 서명자 중 한 명으로 붙잡혀 성주경찰서와 대구경찰서를 거쳐 대구 감옥에 갇혀 신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다가, 1919년 7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이후로는 향리에서 충신당(忠信堂)을 세우고 후진 양성에 매진했고, 특히 한학과 서예에 조예가 깊어 많은 문도(門徒)를 배출하였다. 1948년 2월 8일 향년 73세에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회천선생문집(晦川先生文集)』[1953] 4권 1책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 포장을 추서했고, 2004년 10월 29일 백세각 항일 의적비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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