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668 |
---|---|
한자 | 洪禹傳 |
영어공식명칭 | Hong U-jeon |
이칭/별칭 | 집중(執中),구만(龜灣)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만오 |
출생 시기/일시 | 1663년(현종 4) - 홍우전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702년(숙종 28) - 홍우전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719년(숙종 45) - 홍우전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21년(경종 원년) - 홍우전 충청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 지냄 |
몰년 시기/일시 | 1728년(영조 3) - 홍우전 사망 |
출생지 | 홍우전 출생지 - 전주군 |
거주|이주지 | 홍우전 거주지 - 서울 |
유배|이배지 | 홍우전 유배지 - 평안도 정주(定州) |
묘소|단소 | 홍우전 묘소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서봉리 |
사당|배향지 | 홍우전 신도비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서봉리 소농골 |
성격 | 문관 |
성별 | 남자 |
본관 | 남양(南陽) |
대표 관직 | 경상도관찰사|대사간(大司諫)|공조참판(工曹參判)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의 문신.
[가계]
홍우전(洪禹傳)[1663~1728]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집중(執中), 호는 구만(龜灣)이다. 홍명원(洪命元)의 증손자로, 할아버지는 홍처심(洪處深)이고, 아버지는 정랑 홍수제(洪受濟)이다. 외할아버지는 구치중(具致中), 아들은 홍계희(洪啓禧), 손자는 홍지해(洪趾海)와 홍술해(洪述海)이다.
[활동 사항]
홍우전은 송시열(宋時烈)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1702년(숙종 28)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음직(蔭職)으로 군수를 지냈다. 1719년(숙종 45)의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지평(持平)이 되었다. 재직 중 농지재측량제도의 폐지령과 지방에서 징수해 온 쌀을 또다시 두량(斗量)하는 부조리한 정책을 지적했다. 또한 상민들의 양역(良役) 제도의 개선도 주장했다. 같은 해 세자[훗날 경종]의 대리청정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720년(숙종 46)에는 세자에게 노쇠한 신하를 등용하지 말 것을 건의했다. 이후 헌납(獻納), 집의(執義)를 역임했다. 1721년(경종 원년)에 충청도관찰사와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그리고 1722년(경종 2)에는 지평 박필몽(朴弼夢)의 탄핵을 받고 관직을 떠났다. 탄핵 이유는 홍우전이 감사로 있으면서 부정한 행동을 취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홍우전은 전주에 은거했는데, 장령 이경열(李景說)이 홍우전의 이름을 아예 관원 명부에서 삭제할 것을 주청(奏請)했다. 사헌부에서도 같은 내용의 계(啓)를 올렸다. 이후 여러 사람으로부터 홍우전을 비난하는 청이 올라오자 1724년(경종 4)에 홍우전은 결국 정주(定州)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러나 1725년(영조 원년) 지사(知事) 민진원(閔鎭遠)의 주청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결사(判決事)로 복직되었다. 그러다가 대사간(大司諫)과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냈다. 그해 11월에 최규서(崔奎瑞)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1726년(영조 2)에는 왕이 심성수양(心性修養)에 철저하지 못하다는 점을 직간(直諫)하기도 했다. 1727년(영조 3) 수원부사로서 소론의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최석정(崔錫鼎) 등을 숙종의 묘정(廟廷)에서 출향(黜享)할 것을 주장하다가 도리어 삭탈 관직되었다. 1728년(영조 4)에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완주군 고산면 서봉리 소농골에 홍우전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아들 홍계희가 1766년(영조 42)에 건립한 것으로, 비신이 200m, 폭과 두께가 70㎝에 이르는 거대한 비석이다. 안진경체로 글자 수가 3,700자나 되며, 필획의 정교함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