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1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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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來歷 |
영어공식명칭 | The History of the Geobukbawi Rock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
집필자 | 김영미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01년 8월 7일 - 「거북바위의 내력」 황인덕이 오용근에게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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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1년 12월 29일 - 「거북바위의 내력」『완주의 구전설화』에 「거북바위의 내력」으로 수록 |
채록지 | 「거북바위의 내력」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전주유씨|유창건 |
모티프 유형 | 명당 모티프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에 거북바위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
[개설]
「거북바위의 내력」은 일종의 마을 유래담에 속한다. 마을에 있는 주요한 산, 하천, 바위, 나무 등 특징적인 사물이 생겨난 연유를 설화적 요소로 이야기하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거북바위의 내력」은 황인덕이 2001년 8월 6일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구암마을 오용근[남, 71]에게 채록해, 『완주의 구전설화』[신아출판사, 2001] 85~87쪽에 「거북바위의 내력」으로 수록했다. 무형문화유산온라인지식사전 누리집에서도 「거북바위의 내력」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
자라 혈(穴)에 묘를 쓴 전주유씨 집안에서 인재가 많이 나자 왕실에서 예종의 태(胎)를 자라 혈에 모시고 ‘태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전주이씨들이 선조의 태가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서울 태릉으로 모으면서, 전라북도 완주군 자라 혈에 있던 예종의 태도 태릉[현재는 경기전(慶基殿)에 있음]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예종의 태 자리가 비어 있게 되었는데 미도(米盜)를 해서 큰 부자가 된 유창건이라는 사람이 태봉을 사서 자기 어머니 묘소로 쓰고, 전주동헌의 재료를 옮겨와서 제각(祭閣)[무덤 주변에 제청(祭廳)으로 쓰려고 지은 집]을 지었다. 그 태봉 터에 예전에는 방죽[웅덩이]이 하나 있었는데 방죽 가운데에 거북바위가 있었다.
[모티프 분석]
「거북바위의 내력」은 전형적인 ‘명당’ 모티프를 통해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구암마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거북바위가 있는 곳이 바로 태봉인데, 그것은 자라 혈의 명당 터라서 나라에서 왕의 태를 묻었던 곳이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이러한 명당 모티프를 통해 마을에 있는 거북바위의 유래가 자연스럽게 설명되고 있다. 이는 태봉에 거북바위가 남아 현재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고 믿는 지역민의 마을 터에 대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음을 볼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