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1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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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維楊里 - |
이칭/별칭 | 국수당굿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
집필자 | 서영각 |
의례 장소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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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민간 신앙|마을굿 |
의례 시기/일시 | 3년에 한 번 음력 3월 |
[정의]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에서 마을의 무사태평과 복을 마을 수호신에게 비는 굿.
[개설]
유양리 도당굿은 3년에 한 번씩 음력 3월에 길일을 택하여 불곡산 자락의 국수당에서 과거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 부녀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신[무당]을 데려다 하던 마을굿이다. 원래 유양리[유양동]에서는 산신제와 함께 도당굿이 해마다 음력 3월과 8월에 있어 왔다. 유양리 산고사가 남자들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라면 유양리 도당굿은 부인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하는 행사이다.
[연원 및 변천]
도당굿은 무당의 주도로 하루굿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여기에 드는 많은 비용으로 인해 1980년대 초부터 이미 굿을 치르기에 형편이 어려웠다. 무당을 초빙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고 경비의 조달도 어려운 데다 교회와 교인들의 증가에 따라 도당굿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과 인심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도당굿을 치르는 데 드는 비용은 회원들이 이장과 함께 각 가구마다 걸립을 하여 마련하였으나 그마저 어려워 1997년 도당굿을 한 이후로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지금은 거의 명맥이 끊어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신당/신체의 형태]
유양리 도당굿은 예전의 마을 회관에서 500m 가량 떨어진 유양초등학교 뒤편의 공터에서 행해졌다. 이곳에 국수당이라고 하는 당집이 있어 여기서 가을에 산제사를 드렸으므로 유양리 도당굿을 ‘국수당굿’이라고도 불렀다. 유양리 산고사와는 달리 만신의 주도로 진행되므로 마을에서 특별히 정해 놓은 신은 없으며, 신을 형상화한 신물(神物)도 없다. 다만 국수당이 있던 자리 주변에 향나무 고목이 있어 이를 신목(神木)으로 여겼다. 이 자리에 차일을 치고 굿당을 꾸민 다음 만신의 주재로 굿이 펼쳐졌다.
[절차]
음력 3월 길일로 도당굿 날짜가 잡히면 부녀회원 4~5명과 이장이 합세하여 각 가구를 돌며 경비를 갹출하도록 독려한다. 기독교[개신교]인이건 불교인이건 종교를 가리지 않고 마을 주민이면 그 대상이 되며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였다. 부녀자들이 마을에서 걷은 경비는 만신에게 건네지고, 이에 따라 외지에서 온 4~5명의 만신이 굿을 진행한다. 이때 호적수와 함께 해금이 따라 나온다.
먼저 무당 외에는 차일 밖으로 사람을 모두 내보내고 부정상(不淨床) 앞에서 굿을 시작한다. 서울에서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하던 시절에는 피리, 젓대, 해금을 조무(助巫)로 데려왔으나 비용 문제로 1970년대에 이미 만신 한 사람이 장구를 치고 부정거리를 진행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이 국수당굿에는 화주 세 명과 마을의 부녀자들이 참례하였다.
제상은 불사상(佛師床), 대안주상[上山床], 대감상(大監床), 부정상으로 마련하는데 여기에 쓸 시루떡의 시루는 종류가 많다. 불사시루, 성주시루, 도당시루, 상산시루, 대신시루, 대감시루, 터주시루를 마련한다. 불사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제수는 불사시루[백설기] 하나에 메 한 대야, 누름적, 두부, 배, 사과 세 개씩, 밤을 비롯한 삼색실과, 후추차와 대추차에 종이로 불사고깔을 접어놓고 촛불을 켜 둔다. 여염집의 굿에 절편, 가래떡 세 접시, 각종 채소 나물이 더 들어가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불사상과 대안주상이 국수당굿의 주상(主床)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안주상[상산상]에는 소머리와 돼지머리, 돼지다리, 고기 산적과 같은 육류와 함께 상산시루라 하여 팥 시루떡을 술 석 잔과 함께 올린다. 대감상은 대감시루[팥 시루떡]에 소 또는 돼지의 다리와 북어를 놓는다. 물론 막걸리도 부어 놓는다. 부정상은 떡 두 접시와 북어, 술 두 잔을 올린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상을 한 줄로 놓고 굿을 하였는데, 마을 굿으로서의 국수당굿이 점차 시들해져 가던 1970년대 말에는 굿을 할 비용이 충분히 걷히지 않아 제물도 격식대로 넉넉하게 준비해 쓰지 못하였다. 굿이 끝나면 제물을 나누어 시주한 집에 조금씩이라도 돌렸다.
일단 굿이 시작되면 국수당 당나무 밑에서 마을 부녀자들이 노구메와 물고기, 나물, 과일 등 여러 가지 반찬과 물 한 그릇, 돈과 함께 제주 석 잔을 올린다.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운 상태에서 무당이 가족들의 복을 빌어 주며 소지를 올린다. 이때 무당은 동서남북 산왕대신(山王大神)과 팔도 명산의 산신 그리고 인근 불곡산 산신을 청한다. 동네 마을 사람들이 함께 올리는 치성이라는 것을 알리는 동시에 굿에 참석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무당이 자식이 없는 사람에게 자식을 빌고 마을을 위해 축원을 드렸다. 여기서 무당이 드리던 축원 한 대목을 보면 국수당굿이 마을을 위한 대동치성제의 성격, 즉 도당(都堂)굿의 성격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억조창생 만민들을 구제 중생을 시키시고 가가호호면면촌촌 사는 백성에 하나같이 밝히시고 하나 같이 굽어시어, 억조창생에 만민들을 낮이면 물 맑히고 밤이면 불을 밝혀 불곡산 신령님네 굽어 하찰하옵시고 대동의 제자들이 금일 정성 발원이니 모든 것 다 이루게 하옵시고…….” 이런 축원을 드리고 나서 무당이 흰 고깔을 쓰고 장삼에 붉은 띠와 가사를 입고 불사상 앞에 서서 불사축원거리[佛事祝願거리, 帝釋請拜], 불사맞이, 칠성맞이, 제석거리의 순으로 굿을 진행하였다.
불사상에는 미리 백설기 한 시루와 노구메, 쌀 한 말을 올려 둔다. 불사축원은 먼저 징을 치면서 관세음보살과 여러 부처를 부르고 “도당산은 불곡산, 도당은 국수당”이라 하여 국수당 할아버지를 부르며 박씨 기자(祈子), 김씨 기자 등과 삼화주(三化主), 마을 사람을 일일이 부르며 수명장수를 빌고 “국수당 할아버지 자손 축원대로만 점지하시고”라는 말로 기자를 축원한다. 그리고 “정성을 받으시고 빈촌이 부촌 되게 도와주시라”며 마을 전체를 위한 재수를 축원하는데 불사맞이, 칠성맞이, 제석거리를 만신 혼자 진행하였다.
거리마다 신을 불러 배례하고 축원 드리며 노랫가락과 춤으로 신을 찬양함으로써 신을 즐겁게 한다. 빠른 장단에 격한 춤을 추어 신이 내리면 공수[神託]를 준다. 그 다음에는 호구거리, 본향거리, 만명거리, 상산거리, 장군거리, 별상거리, 오방만장거리, 상산대감거리를 연행한다.
[축문]
무당이 진행하는 굿이기 때문에 유양리의 도당굿[국수당굿]에는 별도의 축문은 아예 없다.
[부대 행사]
점심 무렵부터 무당이 중심이 되어 진행하는 행사이므로 별도의 부대 행사는 없다.
[현황]
1970년대에 2년마다 한 번씩 국수당굿을 하면서 그에 필요한 비용을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마을 노인들이 사라지면서 굿에 대한 믿음도 없어져 결국 1980년대를 끝으로 유양리의 국수당굿은 사라지고 더 이상 굿을 믿는 사람도 없다. 1997년 불곡산 도당굿이 일시적으로 복원되는 듯하였으나 2011년 현재 도당굿은 개최되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