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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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和伯 |
영어공식명칭 | Lee Hwa-bae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84년 - 이화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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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이화백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68년 - 이화백 사망 |
출생지 | 이화백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 |
거주|이주지 | 이화백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 |
활동지 | 이화백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성내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 독립운동가.
[개설]
이화백(李和伯)[1884~1968]은 1919년 4월 9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가계]
이화백은 1884년 4월 3일 지금의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이화백은 1919년 4월 9일 안용호(安容鎬)[1884~1942]·최성원(崔盛源)[1894~1926]·남영진(南永鎭)[1894~1920] 등이 영주군 풍기면 풍기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자 참여하였다. 장소가 풍기장터가 된 것은 당시 순흥·상리·봉현·안정·부석·단산 등의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인근에서 가장 큰 시장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1919년 4월 9일 오후 3시 30분경 안용호 등은 장꾼이 특히 많이 모이는 쌀시장을 중심으로 준비해 간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많은 군중이 호응하였으며, 이화백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주동자 안용호·최성원·남영진 3명은 곧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주재소로 끌려갔다. 이화백은 이들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황정흠(黃鼎欽)[1889~1955]·김용준(金容俊)[1873~1932]·남상필(南相弼)[1891~1972]·황정흠(黃政欽)[1881~1949] 등과 함께 다시 군중들을 선도하여 주재소 동남쪽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아울러 주재소 앞으로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때 이화백은 안용호·최성원·남영진을 체포한 후 철수 준비 중이던 일본군 헌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화백은 1919년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도를 받고 풀려났다.
[상훈과 추모]
이화백은 1998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