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12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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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鶴湖集 |
영어공식명칭 | Hakojip(Literary Work) |
이칭/별칭 | 학호선생문집,학호문집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은영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 6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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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처 | 구호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
성격 | 시문집 |
저자 | 김봉조 |
권책 | 3권 2책 |
행자 | 10행 20자 |
규격 | 크기: 세로 30.8㎝, 가로 21.0㎝|반곽: 세로 19.1㎝, 가로 17.0㎝ |
어미 | 상화내향이엽화문어미 |
권수제 | 학호선생문집 |
판심제 | 학호선생문집 |
[정의]
조선 후기 간행된 영주에서 활동했던 문신인 김봉조의 시문집.
[개설]
『학호집(鶴湖集)』은 김봉조(金奉祖)[1572~1630]의 시문집으로 1813년(순조 13)에서 1822년(순조 22) 사이에 간행되었다.
[저자]
김봉조의 자는 효백(孝伯), 호는 학호(鶴湖), 본관은 풍산이다.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화왕산성을 지켰다. 1613년(광해군 5)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사헌부감찰·예조정랑·제용감정 등을 지냈다. 영주 구호서원(鷗湖書院)에 제향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학호집』에는 서문·발문·지(識) 등이 없어 문집의 간행 경위와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류규가 쓴 행장에는 김봉조의 6대손 김상섭(金相燮)과 7대손 김종석(金宗錫) 등이 유집을 가져와 교정을 부탁하면서, 류규를 ‘도정(都正)’이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다. 류규가 도정에 임명된 것이 1800년(정조 24)이므로 순조 초반에 문집 간행이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학호집』 연보 가장 마지막에 1813년 김봉조를 구호서원에 제향했다는 기록과 그 옆 매목(埋木)한 부분에 ‘순묘(純廟) 임오년(壬午年)’의 이장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813~1822년 사이에 『학호집』이 간행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형태/서지]
『학호집』은 4권 2책으로, 권수제와 판심제는 ‘학호선생문집’이다. 사주쌍변에 반곽은 세로 19.1㎝, 가로 17.0㎝이며, 행자수는 유계(有界)에 10행 20자이다. 어미는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이며, 광곽은 세로 30.8㎝, 가로 21.0㎝이다.
[구성/내용]
『학호집』 권수에는 세계도와 연보가 수록되어 있으며, 별도 서문과 발문은 없다. 권1은 오언절구·칠언절구·오언율시·칠언율시·배율시 등 50여 수의 시가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권2는 소 6편, 장계 9편, 전 2편 등의 공거문(公車文)이다. 그중에서도 「회재퇴계양선생변무소(晦齋退溪兩先生辨誣疏)」는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 출향을 주장하자, 두 사람의 변무를 위해 올린 상소문이다. 「왜정장계(倭情狀啓)」는 1623년(인조 1) 12월 대마도주가 보낸 원지차(源智次)의 접위관으로 차임되어 동래로 내려갔을 때 올린 장계이다.
권3에는 서(書)·기·제문·가훈·행장·대책이 실려 있다. 당시 남인계 인사와 주고받은 편지가 많으며, 내용상으로는 서원 건립과 관련된 것들이 주목된다. 가훈은 노비와 전토를 종가에 붙여주어서 봉선의 자료로 삼는다는 내용이며, 부기된 「제사절목(祭祀節目)」은 시기마다 지내는 제사의 제품까지 일일이 지정되어 있다. 권4에는 부록으로 류규가 지은 행장, 아우 김응조(金應祖)가 지은 행략,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음기 등이 실려 있으며, 말미에는 제현이 김봉조에게 준 증시가 부기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학호집』은 17세기 초반 영주와 안동 지역 사족들의 정치·사회적 동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