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6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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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宗敎 |
영어의미역 | Religion |
분야 | 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집필자 | 송명철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절대자를 믿고 숭배하는 일과 그 체계.
[개설]
여수 지역에는 원시적인 무교(巫敎)에서부터 기독교·불교·유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교가 분포되어 있다. 이 종교들은 때때로 지역민들이 실의와 좌절에 빠졌을 때 용기와 희망을 주기도 하고, 역사의 격변 속에서도 굳건한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고, 개인의 인격과 도덕적 심성의 도야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여수에서는 전통적인 무속이나 유교 그리고 불교 등은 현저하게 축소되는 반면에 19세기 서양에서 유입된 기독교가 확산되는 추세이다.
[무교]
무교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형태로서 흔히 무속이라고도 한다.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무교는 팔관회와 연등회에 나타난 것처럼 유불선 등 다른 종교와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큰 무리 없이 전해 왔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로 무당은 천민으로 내몰려 사회적으로 멸시와 핍박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사이비 종교를 타파한다는 정책에 의해서 굿상이 엎어지고 무당이 연행되기도 했다.
해방 후에도 서구 기독교 국가의 선교 정책에 의해서 유입된 기독교와 함께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은 무교를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종교로 간주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에서 강압적으로 시행한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무교는 또다시 미신으로 치부되어 탄압을 당해야만 했다. 1970년대 이후에 와서야 비로소 면면히 맥을 지켜오던 무교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기독교의 대중화와 과학의 발전, 서구적인 생활로 인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무당은 여수 지역에 근대까지 단골·박수·정각[經客]·점복(占卜)·명도(明圖) 등으로 불리어 왔으나 지금은 일반적으로 무당 혹은 만신(萬神)이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직업무로서 강신무·세습무·학습무가 있다. 강신무는 무병(巫病)을 앓다가 신굿을 통해 신인적(神人的) 존재로 거듭난 무인을 말한다. 세습무는 모계 중심으로 무업을 세습하며 원래 단골이라고 부른다. 학습무는 생활의 수단으로 무경과 의식을 배우고 굿보다는 점복(占卜)을 주로 한다.
여수 지역 무당의 특징은 좌무(坐巫)라는 점이다. 다른 지역의 ‘선굿’과는 달리 전라도의 굿은 무당이 앉아서 무경을 독송하는 경객(정각)이 주가 되는 ‘앉은굿’이 주류를 이룬다. 이 앉은굿은 강신, 독경, 송신의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매우 간헐적으로 행해지기는 하지만, 여수에서도 무당이 주로 주관하는 굿이 무교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굿의 종류는 새로운 무당이 태어나게 되는 내림굿, 죽은 영혼을 좋은 곳으로 천도하는 진오기굿(오구굿·씻김굿), 병을 치료하는 우환굿,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대동굿, 도당굿, 풍년을 비는 풍농굿, 집안의 경사를 조상에게 알리는 여탐굿, 집안의 평안을 비는 천신굿, 재수굿 등이 있다.
1950년 전국의 무당과 점복업자가 모여 경신회를 조직하고, 1971년 대한승공경신연합회로 이어져 오고 있다. 1980년경에 여수 지역에는 강신무가 86명, 세습무가 21명 정도 있었다. 2000년 이후 여수의 통계에는 무교가 별개 항목으로 분류되지 않아 정확하지는 않으나 지금도 대략 100여 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불교]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전진으로부터, 백제는 384년(침류왕 1)에 동진으로부터, 신라는 눌지왕 때 고구려에서 불교가 유입되었다. 통일신라 초기까지 교학이 발달하다가 9세기에 이르러 중국에서 선교가 들어오면서 불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고려시대에는 불교 숭상 정책이 기본이 되었고 호국 불교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불교는 음양오행설과 풍수지리설의 혼합으로 본래의 정신을 상실하였다.
조선왕조는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장려하여 불교는 산중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제는 「사찰령」을 내려 조선 불교를 강제로 통폐합하여 31본산을 형성하고 중앙총무원을 설치한다. 1921년에는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조계종으로 단일화시켰다. 해방 이후 불교계는 비구승과 대처승간의 분열이 시작되고 1970년 태고종이 설립되면서 비구의 조계종과 대처의 태고종으로 양분되었다. 현재는 20여 개의 종파가 있다.
여수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불교 유적으로 보아 통일신라 이후라고 추정된다. 여수의 조계종은 제19교구에 속하며 본산은 화엄사다. 주요 문화재로는 1195년(명종 25)에 보조국사가 세운 은적암이 돌산읍 군내리에 있으며, 남해 제일의 관음 기도 도량으로 알려진 향일암이 돌산읍 율림리에 있다.
주요 사찰로는 보조국사가 호국 사찰로 세운 흥국사가 여수시 중흥동에, 그리고 봉산동에 한산사가 있다. 1971년에 세워진 보현암이 종화동에 있다. 여수의 태고종은 전남교구에 속해 있으며, 1945년에 세워진 보광사와 백련사가 여수시 동산동에 있다. 천태종에 속한 사찰로 둔덕동에 장덕사가 있다. 그밖에 덕충동에 일연사, 광무동에 묘법사 등이 있다.
여수시의 통계에 의하면, 불교인 수는 2005년 기준으로 43,756명이다. 이는 여수 전체 종교인 수의 약 35%에 해당된다. 여수에 유입되어 있는 종교 전체를 놓고 보면 여전히 불교가 중요한 종교임을 알 수 있다. 불교 각 종파를 불문하고 2006년 기준으로 불교 교당은 54개소, 교직자는 89명에 이르고 있다.
[유교]
유교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개 삼국시대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주요 종교로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입지가 좁았다고 하겠다. 유교는 조선시대에는 국가 이념으로서 널리 장려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주기론(主氣論)과 주리론(主理論)의 대결로 발전하고, 선조 때에 이르러 서인과 동인의 붕당으로 대립하여 정치적 혼란을 야기한다. 1911년 일제는 「경학원령」을 내려 성균관을 경학원이라고 개칭하였다. 해방 후 성균관으로 환원되었으며, 1946년 유도회(儒道會)가 결성되고 향교에서는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여수시 군자동과 돌산읍에 1897년에 설립된 향교가 있어서 매년 봄과 가을에 유림들이 석전제를 지내고 있다. 향교의 대성전에 봉안한 문묘에는 5명의 성현, 즉 공자·안자·자사·증자·맹자 및 송나라의 두 현인과 우리나라의 18현인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이름난 학자와 충신들의 공적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서 집을 짓고 제사를 지내는 향사(鄕祠)가 있다. 여수시 덕충동에 있는 충민사는 1601년 건립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충무공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충무공 이순신,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흥국을 모시고 있으며, 매년 3월 10일과 9월 10일에 제사한다. 오충사는 이순신·정철·정린·정춘·정대수를 배향하고 있다. 최영을 비롯하여 이순신·정운·이대원 등을 모시던 영당이 있었으나 1976년 국동어항단지 조성으로 헐렸다. 2005년 기준으로 여수에는 723명의 유교인이 있다.
[기독교]
기독교는 1세기 초 로마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티나에서 예수에 의해서 시작된 종교다. 예수의 가르침은 312년 로마의 공인을 받고,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만민이 믿을 보편 종교라는 의미의 가톨릭(Catholic)이라고 교명을 정하고 380년부터 로마제국의 국교로 발전한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분리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가톨릭을 천주교, 프로테스탄트를 개신교로 부르고 있다.
1. 천주교
임진왜란 때인 1594년 일본의 종군 신부였던 세스페데스가 내한한 사실이 있기는 하지만 본격적으로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친 한국인 학자들에 의한 이른바 ‘서학 연구’, 그리고 이승훈의 세례와 자생적 조선 교회의 창설로 이어지는 과정이 가톨릭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1783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와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예배를 보고 학회를 창건한다. 그러나 그 해에 집회가 발각되어 교인은 흩어지고 만다. 그 후로도 신해사건(진산사건), 신유교난, 병오교난, 1866년 병인교난 등의 박해를 받다가 1882년 미국과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자유로운 활동이 이뤄진다. 1892년 한국 최초의 서양식 성당인 명동성당이 착공되어 1898년 완성되었다.
전라남도에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유입된 것은 1937년 전남교구가 설정되고 목포시 산정동에 교구 본부가 설립되면서이다. 여수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36년이다. 그 해 6월 여수에 부임한 이민두 신부는 20여 명의 신도와 함께 일본인 집을 사들여 예배를 보았다. 해방 후 우방지거 신부가 1년간 머물다 귀환하고 1950년 부바드리시오 신부, 1951년 다시 이민두 신부가 부임했다. 1961년 동산동교회에서 분리된 서교동교회가 설립되었다. 현재 여수에는 동산동교회·서교동교회·신기동교회·문수동교회·선원동교회·여천교회·율촌교회·미평교회 등이 있고, 2005년 기준으로 22,387명의 교인이 있다.
2. 개신교
우리나라를 최초로 방문한 개신교 목사는 1832년 영국 상선 로드암허스트 호를 타고 충청도 홍주 고대도 앞바다에 정박한 독일계 유태인 칼 귀츨라프(Karl Gützlaff)이다. 1866년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 목사 로버트 토마스(R. Thomas)가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를 타고 대동강을 통해 평양에 진입하였다.
1873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만주 선교사인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만주에서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서상륜 등의 도움으로 『신약성서』를 한글로 번역하고, 1880년대 초 일본에서 루미스 목사가 이수정의 도움으로 한문 성경에 한국식 토를 단 『현토성서(懸吐聖書)』와 『마가복음서』의 한글판을 간행한다. 2000년 무렵 한국의 개신교 교파는 160~200여 개에 이르고 있다.
여수 지역에서 개신교는 1905년 10월 5일 여천군 율촌면에 장천교회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장천교회는 전라남도 동부에 설립된 최초의 개신교 교회다. 장천교회는 대한제국 말기에 새로운 문물을 도입해서 국운을 회복하고자 했던 조의환·이기홍·조일환 등이 목포에서 만난 미국 선교사에게 교회 설립을 요청함으로써 건립되었다.
1906년 12월 10일 부산 동래에서 온 김암우가 여수시 군자동 1반에 소재한 초가를 빌려 예배를 드리다가 1910년 2월 조의환 전도사가 부임해 와 초가 4칸을 사들여 여수읍교회라 하고 선교를 했는데 이 교회가 현재 고소동에 위치한 여수제일교회의 전신이다.
2006년을 기준으로 여수 지역에는 471개의 개신교 교회가 있고 교직자는 711명, 그리고 신자는 약 73,000명에 이르고 있다. 여수의 전체 종교인 수가 약 143,000명임을 감안할 때 개신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50%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수에서 개신교는 지나친 난립과 자교회 중심주의로 지역민과 지역 사회에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사랑과 헌신이라는 종교 본질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