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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827
한자 張志淵
영어음역 Jang Jiyeon
이칭/별칭 위암(韋庵)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형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언론인|애국계몽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상주군 내동면 동곽리
성별
생년 1864년 11월 30일연표보기
몰년 1921년 11월 2일연표보기
본관 인동(仁同)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초명 지윤(志尹)
대표경력 황성신문 주필·사장|시사총보 사장|경남일보 주필
상훈 독립장[1962년]

[정의]

조선 말기의 언론인·애국계몽운동가.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초명은 지윤(志尹),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경상북도 상주 출신. 장용상(張龍相)의 아들이며. 장석봉(張錫鳳)의 문인이다.

[생애]

1864년 11월 30일 경상북도 상주군 내동면 동곽리에서 태어났다. 장지연은 일찍이 장석봉(張錫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진사가 되었다. 1896년 7월 독립협회에 가입 활동하는 한편, 1898년 9월 『황성신문』 창간시 기자로 활동한 이래 한말 대표적인 언론인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1921년 11월 2일 경상남도 마산 원정 자택에서 요양 중 향년 58세로 별세했다.

[학력]

사숙에서 전통교육을 받았다.

[활동사항]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처에 발송하였으며,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자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를 기초하였다. 같은 해 사례소(史禮所) 직원으로 『대한예전(大韓禮典)』 편찬에 참여, 이듬해 내부주사로 승진되었으나 곧바로 사직한 후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이승만·양홍묵 등과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정부 실정을 공격하다가 체포·투옥되었다.

『황성신문』과 『시사총보』 창간 시 기자·주필로서 항일구국의 필봉을 휘둘렀다. 또한 광문사(廣文社)를 설립하여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흠흠심서』 등의 간행·보급에 노력을 기울였다. 1901년 이래 황성신문사 주필·사장으로 재직하던 중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통하여 일제의 불법성을 만천하에 폭로하다가 3개월간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황성신문』도 상당 기간 동안 정간처분을 받았다.

1906년에는 윤효정(尹孝定)·심의성(沈宜性)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다가 강제로 해산 당하자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대한협회를 조직하였다. 『대한자강회월보』·『조양보』 등 학회지나 신문에 국권·민권의식을 강조하는 여러 논설을 연재하는 등 계몽운동의 저변을 확대시켰다.

1907년 1월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자 이를 전국적인 운동으로 진전시키기 위한 전 국민적인 동참을 촉구하는 다수의 논설을 발표하였다.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광무황제 강제퇴위와 계몽단체 활동을 억압하는 조선통감부 법령 제정에 계몽단체 회원들과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운동을 펼쳤다. 1908년 일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해조신문』 주필을 담당하다가 경영난에 직면하자, 상하이[上海]·난징[南京] 등지를 유람한 후 귀국하였다.

1909년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지인 『경남일보』가 경상남도 진주에서 발간되자 주필로 취임하여 이듬해 8월 29일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게재하였다가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거처를 마산으로 옮겨 잠시 은둔적인 향리 생활을 하다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수백 편의 글을 연재하였다.

한편, 구례 화엄사의 승려였던 호은대사[1850-1918]를 기리기 위해 1918년 건립한 호은대율사비(虎隱大律師碑)에 ‘제자 숭양산인(崇陽山人) 장지연이 삼가 기록한다[謹誌]’라고 새겨져 있어 호은대사의 제자였던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저서]

『유교연원』·『동국유사』·『대동시선』·『농정전서』·『일사유사』·『위암문고』·『대한최근사』·『아방강역고』·『증보대한강역고』·『대한신지지』·『대동기년』·『대동문수』·『화원지』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1990년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의의와 평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위기 상황에서 활동한 장지연은 국권회복을 위한 실천력을 겸비한 참다운 언론인으로서 기개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한 「시일야 방성대곡」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불굴의 저항정신을 일깨우는 기폭제였고, 이후 전면적으로 확대된 의병전쟁은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계몽활동으로서 언론인 역할을 충실하게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최근 일제의 침략논리인 문명화론에 경도된 일부 그의 글은 친일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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