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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2623
한자 郭再祐
영어음역 Gwak Jaeu
이칭/별칭 계수(季綏),망우당(忘憂堂),충익(忠翼)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수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의병장
아버지 곽월(郭越)
출신지 경상남도 의령군
성별
생년 1552년연표보기
몰년 1617년연표보기
본관 현풍
계수(季綏)
망우당(忘憂堂)
시호 충익(忠翼)
추증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제향 예연서원(禮淵書院)[경상북도 대구광역시]
대표관직 한성부좌윤|함경도관찰사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가계]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황해도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고, 남명 조식(曺植)의 외손이다.

[생애]

1585년(선조 18)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왕의 뜻에 맞지 않는 글귀 때문에 파방(罷榜)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황해도 의주(義州)로 피난하자, 경상남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592년 5월 경상남도 함안군을 점령하고 정암진(鼎巖津)에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의 공으로 1592년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 곧 이어 형조정랑에 제수되었다.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해 조방장(助防將)을 겸했다. 1593년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 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로 임명되어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하였고, 경상우도조방장(慶尙右道助防將)이 되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는데, 그 후 부총관(副摠管),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이후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억울한 죄명으로 한양으로 붙잡혀가고 절친한 사이인 광주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휘말려 죽은 일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였다. 이후 창암(蒼巖)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둔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활동사항]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鼎巖津)[솥바위 나루]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 적이 의심하도록 하기 위한 위장 병사)을 구사해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했다. 그리고 적을 유인해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2,000인에 이르는 큰 병력을 휘하에 거느리고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해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했다. 왜군의 진로를 차단해 계획한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을 기습해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해 물리쳤다. 1592년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전투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해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접근을 막았다.

[저술]

임진왜란 때 왕에게 올린 소계(疏啓) 및 왕의 뜻을 봉행하며 왕복하였던 관문(關文)과 서독(書牘) 등이 수록되어 있는『망우집(忘憂集)』이 있다.

[묘소]

현재 경상북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그의 사우(祠宇)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년)에는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07 2011년 한자(문) 재검토 작업 1709년(숙종 35년)에는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가 ->1709년(숙종 35)에는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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