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한국전쟁과 진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219
한자 韓國戰爭-晋州
영어의미역 Korean War and Jinju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상환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까지의 한국전쟁 기간 중 진주지역에서 벌어진 사건.

[개관]

한국전쟁은 민족의 비극으로서 우리 사회에 큰 피해와 흔적을 남겼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기원과 원인, 수행 주체와 성격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중대한 쟁점이 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전쟁을 일으킨 책임 주체를 둘러싼 논란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전통주의설과 수정주의설 등이 있지만 북한은 1949년 김일성 신년사에서 제기한 국토완정론(國土完整論 : 군사적 수단으로 남북을 통일하고 전 조선에 걸쳐서 혁명을 수행한다)의 입장에서 선제공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미국의 세계전략 구도에 입각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북한 측의 과오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은 북한 정규군의 남하에 의하여 발발되었다. 이 단계에서 전쟁의 성격은 전국적 계급투쟁, 내전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군의 개입으로 한국전쟁은 민족적 성격이라는 새로운 내용을 띠게 되었고, 1950년 말 중국군의 참전으로 한국전쟁은 국제전이 되었고, 부분적으로는 체제 간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지역단위에서 한국전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별로 없다. 각 지역 시사(市史)나 군지(郡誌)들이 이 당시의 일에 대하여 극히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진주시사』나 『진양군사』도 이 시기에 대해서 전혀 서술하고 있지 않고, 전남일보 광주전남현대사 기획위원회의 『광주전남현대사』(실천문학사, 1991)가 거의 유일하게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기간 중 북한 인민군에 의해 실시된 점령정책에 대해서는 권영진(1989)·김주환(1990)·장미승(1990) 등의 저술이 있다.

이 글은 진주를 둘러싼 전투상황을 개관한 후 인민군 점령기간 중에 진주지역에서 전개된 북한 점령정책의 내용을 살펴본다. 그리고 진주 수복 후 유격대활동과 소탕활동을 간략히 살펴보고, 한국전쟁이 진주지역에 미친 영향을 물리적 피해와 함께 계급관계 및 신분관계의 변화, 지역 정치세력관계의 변화 등에 대해서도 분석해보고자 한다. 기존의 연구 성과 이외에 대검찰청의 『좌익사건실록』(1-11권), 남로당 관계 자료, 유격대활동 및 토벌대 관계자의 증언 등을 참고하였다.

[진주를 둘러싼 전투상황]

북한 인민군은 호남지역으로 우회하여 하동, 거창으로 남진, 낙동강을 압박해왔다. 방호산(方虎山)을 사단장으로 한 인민군 제6사단은 중공군 출신자들로 구성된 인민군의 정예부대로서 7월 20일에 전주를 점령하고, 7월 27일 하동까지 점령했다. 서부경상남도지역이 침공을 당하자 미군 제24사단이 투입되었다.

7월 27일 아침, 미 29연대 3대대는 쇠재[우치(牛峙)]에서 인민군으로부터 불의의 기습공격을 받아 60% 이상의 병력과 모든 중장비를 잃고 후퇴했다. 이 날의 전투에서 채병덕(蔡秉德) 소장은 총참모장의 자리를 물러나 스스로 최일선에서 진두지휘를 하던 중 전사했다. 7월 27일 오전 민기식 대령 부대는 함양의 서북방 화산리(花山里) 부근에서 안의와 함양읍을 침공하여온 인민군과 격전을 치렀으나 인민군에 포위되었다가 포위망을 뚫고 진주로 철수했다.

7월 29일 하동 일대를 점령했던 북한 인민군은 진주의 서남쪽에 침입해왔다. 이에 미 제19연대 1대대는 사천의 축동면 구호리에서, 제2대대는 남강 서쪽의 고지에서 방어전에 임했고, 하동에서 철수한 국군은 북쪽 및 남쪽에 배치되었다. 7월 29일 3대의 모터사이클을 앞세운 인민군 공격부대가 진주 서남방의 10㎞ 지점까지 접근해왔는데, 미군은 차단사격을 했지만 인민군의 접근을 저지하지 못했고, 마침 출현한 미공군기들은 인민군에게 큰 타격을 가했으나 인민군의 선발대는 은밀히 움직여 미군 진지를 우회, 다음 날 아침에는 미 제29연대 3대대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7월 30일 장두관 대령은 진주의 방어를 준비했다. 산청 부근에서 민기식 부대에 배속되어 인민군을 저지하고 있던 해병대는 30일 01시부로 미군 제 25사단 제 27연대에 배속되어 04시에 진주로 들어와 14시 30분에 진주의 남방 4㎞ 지점에 있는 개양 부근에 진지를 구축하고 사천의 원전으로부터 동남방으로 우회하여 사천 방면에서 진주 공격을 시도하는 인민군에 대비하였다. 7월 30일 16시 30분에 2,000여명의 인민군이 포의 지원을 받으며 전차를 앞세워 해병대와 미군을 공격해왔으나 미국 포병대의 지원을 받아 백병전을 벌인 한국 해병대의 진지는 돌파하지 못했다. 한편 원전으로부터 철수한 국군 및 미군은 진주 서남방 8㎞ 지점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고 하동 방면으로부터 진주로 밀어닥치는 인민군 주력부대에 대비하였고, 산청에서 인민군과 교전하던 민기식 부대도 점점 병력을 진주의 북쪽으로 철수하여 기동(基洞) 및 211고지와 판문동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했다. 인민군은 진주를 중심으로 하되 주력을 서쪽의 측면에 두고, 일부 병력을 북쪽 및 남쪽으로 이동시켜 진주를 3면에서 포위하여 공격하여왔다.

7월 31일 새벽부터 격전이 벌어졌으며, 30일 밤부터 국군과 미군을 압박하며 전진하던 인민군 주력은 진주의 서쪽 4㎞ 지점까지 쳐들어와서 총공격을 가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판문동과 평거 방면을 잇는 미군 방어진지가 7월 31일 새벽에 돌파되어 붕괴되어버렸다. 7월 31일 06시에 인민군은 진주 시가지에 들어오게 되었고, 산청 방면으로부터 남하해온 인민군 부대와 사천으로부터 북상한 인민군 부대가 합세하여 국군과 미군을 포위하려 했으므로, 부득이 미 제19연대는 의령 방면으로 철수했고, 장두관 대령이 지휘하는 국군과 경찰통합부대는 마산 방면으로 철수했다.

진주를 둘러싼 공방전에서 국군과 미군은 병력에서는 우세했으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고 장비에서 열세인 데 비해, 인민군은 서해에서 상륙한 부대로 패전의 고배를 마셔본 적도 없어 사기가 매우 높았다. 이로 인해 진주전투에서는 싸움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진주를 쉽게 인민군의 수중에 넘겨주고 후퇴했다. 다만 이 전투에서 진주교를 끊음으로써 인민군의 남진을 지연시켜 마산 북방의 교두보 구축에 필요한 시간을 얻게 되었다.

7월 31일 09시를 기해 진주를 철수한 경남 전남북 통합경찰부대는 지휘소를 함안군 군북에 두고 미 제25사단 및 한국 해병대와 합동하여 인민군 제6사단과 진동에서 대치했다. 진주를 철수한 미 제24사단 제19연대도 미 제25사단 예하 부대와 창원군 진동에서 합류했다.

그런데 진동초등학교에 주둔했던 미25사단 제27연대 연대본부가 8월 3일 아침 식사시간에 인민군의 기습사격을 받았다. 이때 통합경찰부대의 진주부대가 즉각 반격하여 인민군에게 심한 타격을 가했다. 오후 2시경 병력이 만재된 30대의 인민군 차량이 밀집 정차하여 증원부대 병력들이 하차하고 있는 광경을 포착하고 제8포병대대와 155㎜ A포대는 화력을 인민군의 하차지점에 집중시켰다. 이 작전에서 인민군 사살 800명에 달하는 전과를 올렸고, 이것은 북한군 제6사단에 의한 마산 침공을 좌절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그 후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의 이름을 딴 킨특수임무부대가 진주 수복을 시도했지만 창녕군 영산 일대가 인민군의 공세로 위기에 빠지자 이를 포기했다.

[진주지역의 북한 점령정책 1-혁명 완수]

진주는 7월 31일부터 9월 24일까지 약 2개월 동안 인민군 점령 하에 놓여졌다. 이 기간 동안 북한 측은 각종 점령정책을 수행하였다. 북한 점령정책은 크게 전국적 차원에서 반제반봉건혁명을 완수하고자 하였던 혁명정책과, 전쟁 승리를 위한 전선원호정책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당과 인민위원회의 복구, 토지개혁, 노동법령 실시, 농업현물세제 실시 및 반혁명세력의 숙청 등이었고, 후자는 사상교육, 정치적 선전과 인적 물적 제반동원정책 등이었다.

○ 당과 정권기관의 재구축

북한 인민군은 남한 점령 직후 혁명정책을 수행할 조직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당과 사회단체 및 정권기관인 인민위원회를 구축했다. 우선 노동당 복구를 위해 남로당 진양군 군당 위원장으로 박판수(朴判洙)를 임명하였다. 부위원장 유학우(이북 출신, 그 뒤 이은조), 조직부장 정원섭(그 뒤 김찬수, 조성환), 조직지도원 윤태석·하상원, 선전부부장 김석구, 선전강사 강용한, 선전부원 김석룡·김점조, 대평면 당책 정우영, 대곡면 당책 강홍규, 금산면 당책 하봉조 등이 알려진 주요 간부들이었다.

사회단체활동도 재개되어 진주시 민청위원장 권준석(權浚錫)은 8월 20일까지 진주시 민청조직 및 각종 초급단체 조직을 완료하고 9월 24일까지 맹원 800여명을 모았다(대검찰청, 『좌익사건실록』 제10권, 1973, p. 513). 진양군 민청위원장에는 정구현(鄭九鉉)이 임명되었으며, 진양군 대곡면 와룡리 민청위원장으로 이환구가 활동하였다. 진주시 여성동맹 위원장 조정순(趙貞順)[전쟁 발발 전까지 진양군농민조합 위원장이었던 정창화(鄭昌和)의 처], 여성동맹 상봉동위원장 윤외분이 활동했는데, 윤외분은 부위윈장 조복희 외 동내 거주민 여 18세 이상 60세 미만의 50명을 여성동맹에 가입케 하였다.

진주지역에는 경상남도 당 및 사회단체도 설치되어 활동했는데, 남로당 경남도당 위원장으로 남경우(南庚宇), 부위원장 김삼홍(金三洪)[산청군당 위원장], 조직부장 안병하(安炳夏)[해방 직후 경북 봉화 민청위원장 출신, 구야산대 활동]이 새로 임명되었다. 경상남도 민청위원장은 최원태, 부위윈장 이봉갑, 정치문화교양부장은 진양군 민청윈장 정구현이 담당했다.

북한 점령군은 인민정권의 수립을 위해 인민위원회를 복구했다. 이에 따라 진주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김인세(金仁世)가 임명되고, 진양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은 유용상, 서기장은 구정회가 맡았다. 이밖에 진양군 수곡면 인민위원장 하만규, 문산면 인민위원장 제태홍, 진양군 대곡면 와룡리 인민위원장 정종백, 자위대장 이기상 등이 알려져 있다. 내무서는 인민군이 직접 맡아서 활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진주시 치안대 선전부장 강달현, 평거지구 치안대장 최팔십, 이현남동 치안대장 정상식, 문산면 치안대장 이문현, 대평면 자위대장 김차상, 정촌면 자위대장 이상섭 등이 알려져 있다.

경상남도 남로당 및 사회단체, 인민위원회, 진주시 당 및 단체, 인민위원회들이 입주한 곳은 연화사(진주시 옥봉동진주향교·제각 등 건물이었다. 경상남도 민청이 있었던 곳은 당시 사방관리소[인사동 소재, 현재 진주시 복지회관], 진양군 인민위원회가 들었던 곳은 진양군 문산의 천주교회 교회당이었고, 그 옆의 벽돌집에 군당 사무실이 있었고 그 옆 기와집에 여맹과 민청이 입주해 있었다. 진양군 내무서(경찰서에 해당)는 문산중학교에 있었다.

○ 토지개혁과 농업현물세 실시

북한내각은 1950년 7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토지개혁에 관한 정령을 발표했고, 이어서‘공화국 남반부지역에 토지개혁을 실시함에 관한 정령 시행세칙’을 공표했다. 몰수 대상 토지는 미국과 이승만정부 및 그의 기관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 조선인 지주의 소유 토지 등이었다. 토지 분배를 받는 것은 고용농민, 토지 없는 농민, 토지가 적은 농민으로서 무상몰수, 무상분배, 그리고 노동능력별 분배원칙이었다. 한편, 지주 토지 매입대금 및 토지와 관계되는 모든 농민들의 부채가 폐지되었다.

1950년 9월에 발표된‘공화국 남반부 해방지역 토지개혁 총결’이라는 내각보도에 의하면, 전국 1,526개 면 중 1,198개 면에서 토지개혁이 완료되어 총 596,202정보가 몰수되었고, 농민들이 지주에게서 구매한 89,994정보에 대한 부채가 폐기되었다. 몰수 토지 총면적 가운데 고용농민에게 28,080정보, 토지 없는 농민에게 196,494정보, 토지 적은 농민에게 348,769정보가 분배되었다. 분배를 받은 농가는 1,267,809호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토지개혁 등 ‘민주개혁’을 완수할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진양군 수곡면에서는 토지 재분배를 시도했으나 실제로 하지는 못하였다. 문서상으로는 재분배 대상지와 피분배자를 작성했으나 이미 파종해놓은 벼의 추수가 아직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런 후퇴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7월 9일의‘농지현물세 관한 내각 결정’에 따라 8월 18일에는 세부사항을 명시한 결정서를 공고하고, 세금 수납을 위해 서숙·메밀 등 잡곡까지도 낱알을 세어서 농민들의 불만을 샀다.

○ 우익세력의 숙청

북한의 전쟁 개시는 명분상‘전국적 범위에서의 혁명’완수와 직결되었으며, 따라서 반혁명세력의 숙청은 점령 시 주된 정치적 과제였다. 당시 북한 경찰조직(내무서)을 통해 하달된 정치적 숙청 대상은 친미분자·민족반역자·친일분자 등이었다. 여기서 친미분자는 국회의원, 남한정부의 각료, 도지사, 경찰서장, 악질 경찰, 판검사 등이었고, 민족반역자는 테러단체의 장 및 악질단원, 미국을 경제적으로 원조한 자 등이며, 친일분자는 일제 때의 총독부 책임자나 시·군급 책임자 및 판검사 등으로 규정되고 있다. 지역단위에서 숙청을 담당했던 기관은 치안대 혹은 자위대로 불리는 자위경찰조직이었다. 지역자위대 구성원의 대다수는 이전에 전향하여‘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경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남한 경찰 및 관료들로부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숙청은 폭력적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들에게 원한을 산 지역단위의 숙청 대상자는 고급관료나 경찰간부들보다는 오히려 하급경찰과 공무원들이었다. ‘반동분자’색출에는 인민위원회·자위대·민청 등 사회단체가 가세하였다. 당위원장이나 인민위원장은 숙청자 명단을 작성해 면자위대에 제출하면, 인민위원과 치안대원들이 가택과 은신처 수색을 통해 체포 구금하였다. 자의적 보복은 금지되었지만, 공식기구를 통하지 않은 감정적 보복 차원의 숙청도 많이 이루어졌다.

진주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평거동 자위대장 최팔십(崔八十)이 8월 하순경 전 평거동 한청단장 강익수가 마을 사람과 본인을 밀고하여 체포되도록 하였으며, 보도연맹 가맹자를 체포케 하여 그 일부를 죽게 한 혐의 등을 내무서에 보고하여 강익수를 약 1주일간 감금토록 했다. 또 9월 5일경에는 민보단장 강황수도 체포하여 15일간 감금되도록 했다. 진주시 이현남동 자위대장이 체포한 진주시 이현남동 구장 강별남은 인민군 후퇴시 함양군 지곡면 대황산록에서 총살되었다. 정봉권 역시 보도연맹원을 경찰에 밀고, 체포되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내무서에 고발당하였으나 인민군 후퇴시 학살의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진주시 이현남동 치안대장 정상식이 지시하여 대원 강영수(姜永洙) 등이 진주시 병사계장 윤화영을 체포하여 구속되도록 하였으나 평거지구 치안대본부에서 석방하였다.

진주시에서 경상남도 인민위원회 정치보위부원으로 가담한 조급수는 1950년 8월 24일에 진양군 대곡면에서 전 진주치안관심판소 서기와 전직 경찰관을 체포하여 자위대 사무실에 감금하였고, 9월 16일에는 집현면에서 진주형무소 간수장을 체포하여 본부에 인계, 살해되도록 했다. 진양군 대평면 자위대원 윤태석은 대평면 국민회장 김영신을 체포하기 위하여 두 차례나 가택수색을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8월 17일에는 대평면 서기, 대평리 어은마을 구장, 전직 경찰관 김종달·김영모·강찬이 전직 경찰관 정순영·정찬영, 대평면 서기 정모 등을 반동으로 지목하고 체포하는 동시에 가재를 차압할 것을 결의하여 일부 인사를 체포하고 동인들의 가재를 차압하였다. 윤태석 등 대평면 자위대원은 또 부역대에 동원을 거부한 대평리 마을 주민을 감금하고 구타하였다.

경찰·군인·관료·지주, 그리고 우익청년단원 등 좌익 탄압에 앞장섰던 사람에 대해서는 정치적 숙청과 함께 재산 몰수도 병행했는데, 토지개혁정령과 시행규칙이 근거 법규였다. 진주시에서 여성동맹원 이면(1948년 여성동맹에 가입, 서부지구 위원장, 1949년 10월 보도연맹 가입)과 조정순은 도피한 진주경찰서 경찰의 가재도구 및 의류품을 악질 반동분자의 재산이라고 자위대원·군사원호위원장 등과 함께 약탈하였고, 과거 방위대에 근무하였던‘악질 반동분자’의 재산(백미 7두 등)도 약탈하였다. 진양군 자위대원 윤태석(尹太錫)은 대평면 국민회장 김영신가를 차압하고 장작 40평가량을 차압하여, 15일간에 걸쳐 100여명의 인부를 동원, 인민군 7사단에 운반 제공하였다. 진양군 문산면에서도 8월 12~14일에 치안대원이 농업창고에 보관 중이던 정부양곡 500가마를 면내 각 마을주민들에게 분배하여 소비하게 하고, 문산지서 근무 순경의 의복을 약탈하고 경찰관사를 몰수한 사례가 있었다.

[진주지역의 북한 점령정책 2-전선 원호]

○ 인적 물적 자원의 동원

북한측은 또 전쟁 승리를 위한 전선 원호정책으로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진주시 민청위원장 권준석은 8월 30일부터 9월 24일까지 250명의 의용군을 모집하였고, 진양군 민청에서는 150여명의 의용군을 모집했다. 처음에는 자발적인 모집이었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점차 강제성을 띄어갔다. 강제 모집은 면별로 민청원 몇 명씩을 할당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반강제로 모집된 의용군의 수는 전국적으로 4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전쟁기간 중에 일반 국민들은 탄약 노력동원에 응해야 했다. 진주는 함안의 전투지역과 함양의 후방지역 사이에 있었으므로, 진주지역에서 동원된 사람들은 탄약을 함안으로 등짐으로 나르고, 올 때는 치열했던 함안전투에서 많이 발생한 부상자를 함양 쪽으로 수송했다. 진양군 정촌면 죽봉의 기차터널 속에 인민군 야전병원이 있었다.

진주 민청위원장 권준석은 부역대 500여명을 강제 동원하여 인민군 의약품 및 기타 물자 운반, 교량 가설 등 노역에 종사하게 하였다. 윤태석 등 진양군 대평면 자위대원은 8월 7일부터 9월 25일까지 약 5회에 걸쳐 약 300명의 인부를 강제 동원하여 인민군 식량 및 탄환 운반, 도로 수리 등 노역에 당하게 했다. 진양군 문산면에서도 인민위원회 노력동원부장 주도로 8월 5일부터 9월 5일까지 500여명의 인부와 우마차를 강제 동원시켜 인민군의 식량·탄환·부상자 운반과 도로 수선 등을 시켰다. 또 9월 21~22일에는 인부 100여명을 동원하여 교량을 수선시킨 사례가 있었다.

물자 동원의 사례로서 진주시 평거지구 자위대장 최팔십은 평거동·신안동·유곡동·이현남동·이현북동 등에서 각기 정맥 1말, 백미 5되를 각출하여 내무서 평거분주소에 제공했고, 9월 4일경부터 22일까지 200명의 부역대를 강제 동원하여 인민군 작전에 참가시켰다. 윤태석 등 진양군 대평면 자위대원은 인민군 군량미 2,000여 가마를 도정하여 제공하였고, 대평리 주민으로부터 장유 30말, 된장 20말, 고추 10가마, 개 10마리 등을 강제 무상 반출하여 인민군에게 제공하고, 축우 2두를 도살 제공하였다.

이상 인민군 점령 후 북한 측이 실시한 점령정책은 주민의 장악과 당면한 전쟁의 승리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 지나치게 조급하게 추진됨으로써 강제성을 띠게 되었고, 결국 남쪽 주민들들에게 부정적 태도를 유발했다고 할 수 있다.

[진주지역의 수복과 유격대 활동]

경남·전남북 통합경찰부대의 진주경찰서 부대는 진주가 수복된 9월 25일 당일에 귀환했다. 그 후 진주경찰은 국군의 총반격작전에 의해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 잔여 병력을 소탕하고 이들에 대한 투항 권유 등 후방지역의 치안 확보에 노력했다. 미군과 함께 경찰이 들어와 관할 지역별로 치안 확보를 서두르는 한편, 좌익계와 부역자 색출에 나섰다.

유격대활동은 6·25 후 인민군이 진주하기 전에 이 지역에서 벌써 시작되었다. 지방당의 유격대들은 후퇴와 피란을 서두르던 경찰과 우익인사들을 습격했다. 유격대는 1950년 7월 13일 산청군 오부면 오전리 신기부락을 습격해 우익인사들을 살해했고, 7월 17일 장흥·담양·화순·광주·광양 등지에서 일제히 군경 및 우익인사에 대해 습격하였다. 전쟁기간 중 지리산지구의 이현상 부대는 지리산 주변의 잔류 좌익청년들을 규합해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8월 25일에는 창녕의 미군부대를 습격하여 백여명을 살상하고 탱크와 자동차를 파괴했다.

인민군이 퇴각한 1950년 9월 이후 인민군 패잔병·구빨치산·인공부역자 등이 모두 입산해 산간지대 인민유격대의 숫자는 급격히 불어났다. 한때 전국적으로 5~8만명 정도로 추산되었던 입산자수는 일시 산중으로 피신했던 정규 인민군 병력 중 대부분이 북상 길을 택한 이후인 1950년 10월 말에는 약 2만5천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이들 중에는 점령치하에서 인공의 당정조직에 관여했다가 인민군이 후퇴하자 부역행위가 탄로나 처벌받을까봐 두려워 산으로 달아났던 사람이 많았다.

진주지역에서 활동했던 경상남도와 진주시·진양군의 남로당·사회단체·인민위원회 간부들 300~400명은 9월 24일 새벽에 진주를 탈출하여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에서 저녁을 먹고 달띠기산에서 야영을 한 후 25일 새벽에 남강을 건너 아침에 산청읍 정곡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공습을 당하여 아비규환 상황이 전개되었다. 해질녁에 다시 출발하여 밤에 함양에 들어와 26일 아침에 함양군 휴천면 대포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곳 대포리에서 경상남도 유격대를 조직했다. 대원은 250여명이었고, 유격대장으로는 남로당 경남도당 조직부장인 안병하가 임명되었다. 유격대 조직 시 참여 의사가 없는 10여명은 시계와 배낭 등을 놓고 하산했다. 군 지역 간부 일부와 면지역의 당 및 사회단체 간부들은 도 단위에서 체계적 관리를 하지 못하여 각 지역으로 가서 유격활동을 하도록 조치되었다. 사천군 간부들은 와룡산, 진양군 간부, 의령군 지역 간부는 자굴산 하는 식으로 내려가서 활동하도록 했다. 진양군의 경우 하산하다가 정원섭 남로당 조직부장은 사살되고, 구정회 진양군 인민위원회 서기장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경남도당 산하 각급 유격대는 지리산·덕유산·가야산·백운산 등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유격대 확보지역에서는 국군측이 10월 하순까지 면소재지까지 완전히 수복할 수 없을 정도였다.

10월 24일에는 40여명의 유격대원이 대평면 대평리 주둔 전경대를 습격하여 경찰대가 각종 실탄을 보관하고 있었던 권모가에 방화, 폭발하게 했다. 또 우익요인 정영식가에 방화하여 동가와 인근 집까지 불탔다. 습격과정에서 이도익의 머슴 2사람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여 폭사시키고, 순경 1명을 사살했다. 또 우익요인 진의갑을 체포하여 취조한 후 학살하고, 전직 경찰관가에서 소 3마리, 의류 다수 점을 약탈했다. 11월 8일에는 진양군당 유격대 30명, 인민군 80명 등 110여명이 수곡면 사곡리 싹실마을 주둔 26전경대를 습격하였다. 11월 19일에는 100여명이 대평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관의 처와 대평면 한청 경비과장 황진원 등 2명을 사살하는 동시에 경찰관 가족 3명에 총상을 가했다. 11월 20일에는 50여명이 수곡면 사곡리 주둔 26경찰전투대를 습격하고, 11월 22일에도 수곡면 사곡리 주둔 26전투경찰대를 습격하여 경찰관 1명을 사살했다. 11월 24일에는 200여명이 대평면 중촌리에 침입하여 면사무소와 초등학교에 방화하고, 우익요인 유재화와 2명의 집을 방화했다. 11월 25일에 수곡면 사곡리 주둔 26전경대본부로 쓰이던 하영진의 가옥외 우익요인 2명의 집에 방화하였다.(조선노동당 경남 진양군당사건, 대검찰청, 『좌익사건실록』제11권, 1975, pp.14-16)

10월 중순이 되어 11사단이 새로 창설되어 호남지구와 지리산지구의 토벌을 전담하게 되었다. 11사단이 토벌작전에 들어가면서 내세운 작전개념은 ‘경벽청야’작전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작전지역의 산간부락이 거의 소실되고 주민들은 고향에서 내몰렸다. 그러나 이 작전은 주민들의 반감을 키워 자진입산자를 늘리는 역효과를 냈다. 1951년 2월 10~11일에 9연대 3대대가 저지른 거창 양민학살사건도 그러한 무리한 작전의 수행과정에서 빚어진 참사였다.

진주지역에서는 1951년에 들어와 4월 11일 대평면 대평리 한청 분단장 김종덕이 유격대원에게 납치되었다가 경찰의 진격으로 방면되었다. 6월 1일에는 수곡면 사곡리 대각마을 거주하재신·하영래, 구장 이기호 등 3인을 살해할 목적으로 무장유격대 14명이 침입하였다. 6월 중순 유격대원 300명이 대평면 대평리에 침입하여 식량과 의류를 약탈하고 한청 특무원 1명을 사살했다. 6월 25일에는 대평면 당책 정우영 등 8명의 유격대원이 대평면 상촌리에 침입하여 대평면 국민회장 김영신을 체포, 사살하였다. 7월에는 진주시 유격대원 약 200명이 진주를 습격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7월 15일 유격대원 약 100명이 수곡지서를 습격하러 가는 도중 경찰대와 교전하여 진주경찰서 형사 조만환을 사살하고, 하재신의 부친을 납치한 후 사살하였다. 8월에는 유격대원 약 300명이 산청경찰서를 습격할 목적으로 산청경찰서에서 4㎞까지 접근했으며, 8월에는 또 수백 명이 산청군 단성면 자양리에 침입하여 보급투쟁을 전개하였다. 9월 28일에는 7명의 유격대원이 명석면 신기마을에 침입, 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공출 반대, 납세 반대, 도로파괴, 전주 절단을 감행하라는 선전을 하고 삐라를 살포했다. 10월 9일에는 진양 군당 위원장 조성환을 비롯하여 조직지도원 윤태석 등 6명이 군당인 달띠기산을 출발, 대평면을 경유하여 10월 11일 밤 10시경 진양군 나동면 미륵골에 도착하여 마을 주민을 집합시키고 군중대회를 열어 “인민군이 불원간에 재침점하여 인공국이 수립될 것이니 대한민국에서 시키는 공출, 납세등을 반대하는 동시에 도로를 파괴하고 전주를 절단하여 교통통신을 두절케 하라”는 등 선전을 하였고, 일반성면 남산리, 사봉면 방촌리 등에 잠입하여 공작을 하던 중 10월 14일 경찰에 포위되어 진양군당 위원장 조성환은 사살되고 나머지 5명은 생포되었다. 윤태석(대평면 거주, 조선노동당 진양군당 조직지도원), 강용한(이반성면 거주, 조선노동당 진양군당 선전강사), 김석룡(정촌면 거주, 노동당 진양군당 선전부원), 하상원(대곡면 거주, 노동당 진양군당 조직지도원), 김점조(본적: 산청군 삼장면, 노동당 진양군당 선전부원) 등이 체포되어 윤태석과 김점조는 사형, 강용한과 김석룡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진양군당 유격대 단위의 작전은 거의 불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피해상황과 재건활동]

한국전쟁으로 우리 민족은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인적 피해를 보면 전쟁으로 인해 죽거나 부상한 사람이 남한 2백만 명(민간인 99만, 군인 99만), 북한 330만 명(민간인 268만, 군인 61만), 남북한 합계 530만 명으로 남북한 총인구 3천만 중 6명에 1명꼴로 희생을 당한 것이다. 중공군 92만, 유엔군 16만 명을 합치면 600만명 이상에 달한다.

진주지역에서 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희생자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양군 대평면 상촌리·대평리·당촌리·신풍리 등지에서는 좌익운동을 한 인사들이 많았는데,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보도연맹에 편입되었던 진보적 인사들이 경찰에 끌려가 학살당한 예는 대평면 여러 마을에서도 확인된다. 정촌면에서는 48명의 보도연맹원이 학살당했다. 진주시 평거동 한청단장 강익수는 보도연맹 가맹자 강낙중·최춘개·문진옥·최명식·강순섭·최팔십 등을 경찰에 체포케 하여 그 중 문진옥·강순섭을 학살당하게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진주의 시가지는 폐허로 변했다. 인민군이 진주에 들어온 7월 31일부터 8월 4일까지 진주시에 대한 대대적 폭격이 있었다. B-29편대가 남쪽으로부터 날아와 네이팜탄과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하였고, 기총사격을 가하였다. 진주는 인민군 주둔지역이 아니라 함안의 전투지역으로 가는 통과지역이었지만, 전략요충지로서 많은 물자들을 인민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파괴한 것으로 보인다. 이 폭격으로 시 외곽을 제외한 시가지 전역이 불탔다. 진주시 주민들은 인민군이 들어오면서 인근 진양군 등지로 피난하여 인명 손실은 적었지만, 그래도 새벽에 폭격을 한 경우도 있어서 수십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진주시청을 비롯하여 진주고진주여고 등 지역의 큰 건물은 모두 미군 폭격기의 폭격을 맞아 무너졌다. 당시 영남의 제일가는 누각으로서 국보 제278호였던 촉석루가 소실되었고, 남강교도 폭파되었다. 남강교는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군 측에서 폭파했던 것이고, 촉석루는 북한군 지휘소가 설치되어 있어 9월 1일에 미군기가 소이탄을 투하하여 소각했던 것이다. 폭격된 남강교대동공업의 직원을 동원하여 가교를 설치하여 임시통행조치를 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주경찰서도 폭파되어서 진주경찰서 부대는 전 김준기병원을 임시청사로 사용했다. 진주시는 1950년 9월경 수복되었으나 몇 년 동안 전쟁의 잿더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폐허의 진주시가지를 복구하기 위한 사업은 1952년에 시작되었다. 도시복구사업은 진주시 토지구획정리사업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당시 민선으로 뽑힌 김용주 시장이 진주시 도시구획정리사업의 최고책임자였지만, 실무 담당자는 당시 진주시청 건설과 도시계장 임삼만와 박재우씨다. 구획정리사업에 들어간 지역은 진주시 중심가 지역의 30여만평 규모가 되었다. 지금의 중앙로터리와 평안·봉곡·인사 로터리 사각의 안쪽에 해당하는 지역과 그 외곽의 일부 지역을 포함했다. 당시 철거 대상이 된 건물만도 800여동에 이를 정도였고,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반파되어 복구 대상이 된 건물만도 2천여동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도면상에 도로 폭 35m를 기준으로 계획을 세웠으나 경상남도의 심의과정에서 5m, 건설부의 심의과정에서 5m가 각각 줄어 25m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25m 도로 폭의 설계와 건설과정에서 시민들과 당시 구성되어 있었던 진주시의회 일부의원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지금의 중앙시장의 앞에 해당하는 옛 종로거리가 6m로 당시로선 제일 큰 길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25m도로는 당시 시민들에게는 대단히 넓게 느껴졌다. 1952년 8월 20일로 ‘대안토지구획정리사업’의 명칭 아래 신도시의 구상과 설계로 수립된 도시계획을 실시 착공하여 6년 4개월만인 1958년 12월 31일 도로축조공사 및 환지배정(실지조성)을 실시 완료한 동시에 일부 하수도 및 포장공사를 완료하였다.

[전쟁의 영향-전근대적 제 관계의 청산]

○ 지주계급의 몰락

농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은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진주지방에는 부호가 많고 시내 거주자로서 2백석 이상 추수하는 지주계급에 속하는 자만도 백 수십 명에 달하였다. 1940년 현재 조선인으로서 5백석 이상의 소작료수입을 거두는 자를 들면 다음과 같이 36명에 달하였다.

정진규(鄭晉圭), 하만복(河萬福), 정상진(鄭相珍), 김두태(金斗台), 정표환(鄭杓煥), 박채규(朴彩珪), 정태범(鄭台範), 하영진(河永珍), 이장희(李章喜), 민영찬(閔永贊), 정형규(鄭亨奎), 서종숙(徐宗淑), 서상필(徐相弼), 강주수(姜周秀), 방석영(方錫榮), 강문현(姜汶鉉), 정경민(鄭慶玟), 홍학봉(洪鶴奉), 박진성(朴鎭成), 강순세(姜順世), 박기용(朴起用), 전봉세(全鳳世), 정수영(鄭洙永), 허치구(許治九), 김동식(金東式), 김윤명(金潤明), 정문영(鄭文永), 윤병용(尹炳用), 허혁(許赫), 조연인(趙鍊仁), 한석동(韓石東), 하영희(河永熙), 정봉숙(鄭奉淑), 문성범(文聖範), 최인우(崔寅愚), 박태원(朴台源)

하영진은 3천석을 추수하였는데, 수곡면 일대의 토지(사곡리에서 약 23정보)뿐 아니라 산청군 삼장면, 하동군 청암면, 진양군 대평면 일대에도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소유 토지를 합치면 200정보가량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하영희는 1천석을 추수하였는데 인근 지역에 약 70정보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과 한국전쟁, 농지개혁을 거치면서 모두 몰락하였다. 진주시의 지주인 정명수(鄭命壽)[鄭相珍의 子]은 35.9정보, 정경문은 43.7정보, 홍갑수(洪甲秀)는 19.7정보, 방찬원(方瓚源)은 20.3정보의 농지를 분배당했다. 도 진양군 수곡면 사곡리의 하영진(河泳珍)은 37.2정보, 하내효(河來孝)는 15.4정보, 하병길(河炳吉)은 17정보를 분배당했다. 진양군 수곡면 사곡리의 지주 8호가 모두 지주계급의 지위를 상실했는데, 이들 중 5호는 대부분의 농지를 분배당하고 마을을 떠나 전업했다. 산업자본가로 전신에 성공한 경우는 3천석의 소작료를 추수한 대지주였던 하영진씨의 아들 하석근씨가 유일하다. 하석근씨는 효성그룹 창업자인 조홍제씨의 처남으로, 농지개혁으로 받은 지가증권을 조홍제에게 위탁하였고, 조홍제가 이것을 가지고 귀속재산을 불하받아 나중에는 대재벌의 일원이 되었다. 나머지 3호는 위장 자작지에 근거하여 영세지주 겸 자작농으로 전락했다. 지주만으로 이름났던 사곡마을에서 지주계급은 완전히 사라졌다.

○ 신분제 유제의 해체

한국전쟁은 신분제 해체에도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신분제는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법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지주소작관계라는 물질적 토대가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하인의 신분에 있었던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예컨대 해방 직후까지도 진양군 수곡면 사곡마을 지주양반이었던 하영진가는 9호, 하영희가는 6호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다.

신분제 해체의 결정적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인민군의 점령지역이 된 직후 인민군 지도하에 구성된 치안기관인 내무서에는 천민 출신들도 참여하였다. 천민신분은 치안대 활동을 통해 지배관계의 역전을 체험했을 것이고,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수복 후 권력구조의 재역전이 일어난 다음에도 다시 양반신분의 지배하에 있게 될 수는 없었다. 또 한국전쟁과 농지개혁을 통해 양반신분은 신분적 지배를 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대토지 소유-를 상실했다. 신분제 해체의 구체적인 경로는 도시로의 이주였다. 진양군 수곡면 사곡마을의 경우 천민 25가구 중 해방 직후 3년간 이출한 가구가 9가구였고, 한국전쟁 기간과 직후에 이주한 가구가 6가구였다. 마을을 떠난 사람들은 진주·부산 등 바로 도시로 이주하거나 부근 농촌으로 이주한 다음 나중에 도시로 이주하는 경로를 밟았다.

[의의]

이상에서 한국전쟁 기간 중 진주지역에서 전개된 정치변동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약 두 달간의 단기간에 북한 측이 당이나 사회단체 등의 정치적 조직체, 인민위원회 내무서 등 정권기관을 구축하고 반혁명세력의 숙청과 토지개혁 등 혁명을 수행하려는 과정에서 전체의 진보적 역량을 공개 활동에 투입되었다. 후에 미군의 반격으로 38선 부근에서 휴전이 이루어졌을 때, 한국전쟁 전과 같이 운동역량을 지하로 재집결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전후에 독재 지배에 의해 뿌리째 뽑혀버렸다. 이로 인해 한국사회는 반민주적 구조가 공고하게 되었고, 민족통일과 민주의의 실현은 지연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그 자체 거대한 계급투쟁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진주지역의 사례에서 보듯이, 이것을 겪으면서 전근대적인 지주-소작관계, 신분관계를 일거에 청산하여 반봉건 민주주의적 과제가 일정 정도 실현되었다. 이것은 그 후 한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에 극히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시민전쟁의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이** 진주 지역의 한국 전쟁 부분 내용 중 추가, 수정 요청합니다.
킨 특수부대 및 진동리 부근 전투(1950.08.02.~1950.08.13.)에는 미 25사단과 북한군 6사단이 진주시, 마산시, 함안군 일대에서 전투를 하였다.
진주 전투(1950.08.28.~1950.08.31.)에는 국군 민부대 30연대·미 24사단과 북한군 4·6사단이 전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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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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