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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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여신(成汝信) : 자는 공실(公實)이요, 호는 부사(浮査)며, 우윤(右尹) 성두년(成斗年)의 아들이니 가정(嘉靖) 병오년(명종 1년, 1546)에 나서 만력(萬曆) 기유년(광해군 1년, 1609)에 생원과 진사의 두 시험에 합격했다. 일찍이 남명(南冥)과 구암(龜巖)의 두 문하에서 유학하여 경의(敬義)의 지결(旨訣)을 얻어듣고 종신토록 마음에 깊이 새겼다. 서책은 읽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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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공약(功若), 호는 관란(觀瀾). 승지(承旨) 정대융(鄭大隆)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정달현(鄭達賢)은 효성이 깊다고 이름이 나서 나라에서 교관(敎官)을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명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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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여준(汝準)이고, 아우는 정대영(鄭大榮)이다. 문장과 필법으로 이름을 떨쳤다. 의기사(義妓祠) 앞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바로 정대융이 쓴 것이다. 후에 우승지(右承旨)를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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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촉석루에 있는, 의기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 1593년(선조 26) 6월 29일 임진왜란의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이 바위에서 남강에 뛰어들어 순국하였다. 논개의 의열(義烈)을 상징하여 진주의 선비와 백성들이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고 명명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촉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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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기(義妓)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 명암(明庵) 정식[1683~1746]이라는 선비가 진주 사민(士民)들로부터 금품을 모아 논개 의거의 징표로서 1722년(경종 2)에 다듬은 것이다. “비석을 다듬어 놓은 해로부터 18년 뒤인 1740년(영조 16) 가을에 진주 우병사인 남덕하[1588~1742]가 왕의 득명을 받고 이듬해 봄에 비를 세우다”라는 기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