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윤현(李胤玄) : 자는 시로(時老)요, 호는 영모당(永慕堂)이니 매월당(梅月堂) 이하생(李賀生)의 증손이다. 18세 때에 부친을 모시고 산간 마을에서 천연두를 피하더니 갑자기 어느 날에 도적이 들어와 부친을 해치려고 했다. 윤현이 몸으로 날개처럼 덮어서 겨우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온몸에 부상을 입고 이어 병을 얻어 의원을 찾아 약을 구하여 8년을 견디다 마침내 천수를 마쳤...
진주목 관아의 기녀로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왜적에게 함락되던 계사년(1593) 6월 29일 촉석루 아래 우뚝한 바위(의암, 義巖)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들어 죽은 순국의 여인. 논개의 사실을 맨 먼저 기록한 이는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다. 그는 인조반정 후 양주 서산에 숨어 지내다 광해군 복위를 꾀한다는 무고에 얽혀서 아들과 함께 서인 정권의 손에 죽임을...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홍보(弘甫), 호는 삼도(三島). 아버지는 임희중(任希重)이다.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급제,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 현감 박광전(朴光前), 능성현령 김익복(金益福), 진사 문위세(文緯世) 등과 보성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와병중이던 박광전 대신 의병장으...
진주의 소리는 진주지역의 교방을 중심으로 전승되던 가곡, 시조 등 소리와 동편제를 중심으로 한 판소리. 진주는 일찍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토착부호들이 많아 전통문화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우리의 전통문화가 성행했다. 또한 진주는 역사적으로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여서 일찍부터 교방이 설치되어 관 주도의 문화가 전파되었고, 가무가 발달하여 많은 명창이 배출되었다. 진주는 신라시대부터 서부...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에 있는 의병장 최대성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1752년(영조 28) 최대성(崔大晟)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세운 공로를 인정하여 “충신모의장군 증통정대부형조참의어모장군행훈련원정최대성지려(忠信募義將軍 贈通政大夫刑曹參議禦侮將軍行訓練院正崔大晟之閭)”를 내리면서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 안간지구대 옆에 동향하여 있다.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