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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0049
한자 朴泰茂
영어음역 Park Taemu
이칭/별칭 춘경(春卿),서계(西溪)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백태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선비|학자
아버지 박창윤(朴昌潤)
어머니 하달영(河達永)의 딸 진주하씨(晋州河氏)
성별
생년 1677년연표보기
몰년 1736년연표보기
본관 태안(泰安)
춘경(春卿)
서계(西溪)
추증 사복정(司僕正)
제향 지계사(芝溪祠)

[정의]

조선 후기의 학자.

[가계]

본관은 태안(泰安). 자는 춘경(春卿). 호는 서계(西溪). 능허(凌虛) 박민(朴敏)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황해도수군절도사를 지낸 박창윤(朴昌潤)이며, 어머니는 진주하씨(晋州河氏)하달영(河達永)의 딸이다.

[생애]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에 의하면, 1677년(숙종 3) 출생하여 1736년(영조 12) 5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706년(숙종 32)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평생 영달을 구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하정(河瀞)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권두경(權斗經)·하덕망(河德望) 등과 교유하였다. 하정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 집안의 제삿날을 당하면 옆방으로 옮겨서 종일토록 사람들과 말을 나누지 않으니, 선생이 학동들에게 말하기를 “태무는 너희들의 사표이니, 나이 어리다고 해서 얕보거나 홀대하지 말고 공경하여라”고 하였다 한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문도 수백인을 거느리고 반군에 대항하였으며, 창고 안의 양곡 수백 석을 내어 군량으로 쓰고, 남은 재산을 다 털어서 다른 의병을 돕고 격려하였다. 집안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다고 걱정하자 그가 태연히 이르기를 “임금이 급한데 가족 걱정을 어찌 하겠는가?”라 하였다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삼베옷으로 복을 입었다.

[저술]

시문집 『서계집(西溪集)』을 비롯하여,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소학촬요(小學撮要)』 등의 저술이 있는데, 『서계집』은 1812년(순조 12) 증손 박지서(朴旨瑞)가 편집, 간행하였다.

[상훈과 추모]

사복정(司僕正)에 추증되었으며, 지계사(芝溪祠)에 모셔졌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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