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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0331
한자 高麗時代
영어의미역 Goryeo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백태남

[정의]

918년 왕건(王建)의 건국 이래 1392년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에 멸망할 때까지 34대 474년 간 존속한 왕조.

[개설]

진주는 통일신라 말부터 후백제를 거치면서 강주(康州)로 불리다가 940년(태조 23)에 진주로 개칭되었고, 983년(성종 2)에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진주목이 되었다. 이에 앞서 광종 때에는 진주향교가 창설되어 진주의 학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고려 초의 장군으로 거란군 격퇴에 공을 세운 강민첨(姜民瞻)을 비롯하여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하륜(河崙), 조선 초의 무신 하경복(河敬復) 등이 모두 이 진주향교에서 수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995년에는 전국이 10도로 개편될 때 진주는 산해도(山海道)에 소속되면서 절도사를 두어 정해군(定海郡)이라 불렀다. 1012년(현종 3)에는 절도사를 없애고 안무사(按撫使)를 두었으며, 1018년에는 안무사 제도를 폐지하고 진주목으로 환원하였다. 1232년(고종 19)에는 몽고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있던 대장경판이 소실되자 강화도에 천도해 있던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경판 재조에 착수하여 강화에 본사(本司)를, 진주에 분사를 두고 8만대장경을 완성하였다. 이 동안 진주목은 1310년(충선왕 2)에 일시 진주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진주목으로 회복되었다.

[행정제도]

940년(태조 23)에 전국의 주·부·군·현의 명칭을 개정할 때 강주는 진주로 개칭되면서 하동·남해·고성·함안·거제·단성·거창·함양·합천 등 9개의 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전국에 8개 목을 두면서 진주목으로 환원하고, 지금의 단성과 하동을 속군으로 두었다. 한편, 고려는 지방 통치의 한 방법으로 지방 대읍의 수령을 계수관(界首官)에 임명하고 주위의 소읍을 통할하게 하였는데, 진주는 고려 전기에 합천·고성·남해·거제를 담당하는 계수관이 되었다. 1106년(예종 1)에는 종전의 영남도·영동도·산남도 등 3개 도를 통합하여 경상진주도(慶尙晋眞州道)라 하고, 1171년(명종 1)에는 경상진주도를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합주도(晋陜州道)로 나누었는데, 진주는 진합주도에 속하면서 감영 소재지가 되었다. 1186년에는 이를 다시 통합하여 경상주도로 고쳤으며, 1204년(신종 7)에는 상진안동도(尙晋安東道)로, 1298년(충렬왕 24)에는 경상진안도(慶尙晋安道)라 하였다가 1314년(충숙왕 1)에 5도가 설치되면서 경상도(慶尙道)로 된 후 지금까지 이 명칭이 내려오고 있다. 이때 경상도는 1경, 2목, 30군, 92현을 거느렸는데, 진주목의 관할 구역은 4군 26현이었다.

[군사제도]

고려의 군사제도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누었는데, 지방군은 주현군(州縣軍)이라고도 하였다. 지방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군사도라는 별도의 구역으로 나누고 군사를 배치하였는데, 진주는 진주목도(晋州牧道)로서 약 1,500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중앙의 지휘를 받았다.

[경제제도]

고려시대에는 물가조절기관인 상평창(常平倉)과 빈민구제기관인 의창(義倉)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진주에도 이들 기관이 설치되어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제하였다.

[교통제도]

고려는 성종 때 교통체계의 하나로 22역도 525역의 방대한 역조직을 완성하였는데, 진주는 산남도로서 평거역 등 4개의 역을 두고 직접 관할하였다. 한편, 각 지방에는 조세의 보관과 운반을 위한 조창(漕倉)이 설치되었는데, 경상도 지역에는 마산과 사천에 설치되어 있었다. 진주의 조세는 사천의 통양창(通陽倉)에 보관되었다가 5월까지 해로와 수로를 이용하여 수도로 운송하였다.

[농민봉기]

1186년(명종 16)에 진주목사 김광윤(金光允)이 백성들을 심히 착취하자 민란이 일어났는데, 조정에서 목사를 귀양보내고 민심을 수습하여 무마되었다. 그 뒤 1200년(신종 3)에 공사노비의 폭동에 편승한 정방의(鄭方義) 일당의 반란이 일어나 인근 지역을 휩쓸며 기세를 떨쳤으나 진주민들의 슬기로운 대처와 협력으로 난을 진압하였다.

[대외관계]

고려 말에 이르러 진주가 위치하였던 남해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왜구의 출몰이었다. 기록에는 고려시대를 통하여 약 500회의 왜구 침략이 있었고, 진주의 인근 해역에만도 31회나 침입하여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진주에서는 이와 같은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1379년(우왕 5)에 토성이던 진주성을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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