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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0359
한자 拱北門城壁石刻
영어음역 Gongbungmun Seongbyeok Seoksak
영어의미역 Inscription on the Fortress Wall of Gongbungmun Gat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의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석각
건립시기/연도 1680년연표보기
높이 25㎝
길이 80㎝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일원
소유자 국유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공북문 성벽에 새겨진 글귀.

[개설]

공북문 성벽 석각은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위치한 진주성의 북쪽문인 공북문(拱北門) 서쪽 성기에 새겨져 있는 글씨로 가로 80㎝, 세로 25㎝ 크기의 석재에 ‘康熙十九年山陰馬兵中哨泗川昆陽河東丹城咸陽六官一哨’라고 씌어져 있다. 이는 진주성의 수축을 담당하였던 구역의 표시를 나타낸다.

[명칭유래]

조선시대의 축성 기록을 살펴보면, “세종연간에 읍성의 축조 논의가 있으면서 각각의 도와 고을의 성자를 연변에서부터 시작하여 축조하도록 하였으나 여러 차례 흉년으로 축조하지 못한 예가 많으니, 금후를 비록 흉년을 만났더라도 농사가 조금 풍년이 든 고을의 군인을 징발하여 쌓자”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삼도의 읍성이 연변에서부터 해마다 축조하고 있으나 한 도내에 두세 곳을 동시에 축조하게 되어 백성들이 휴식할 수 없으며 감독관은 속히 완성시키기에만 힘써 심하게 독촉하여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자도 꽤 많으니 이제부터는 한 도의 백성이 많고 적음을 참작하여 두세 패로 나눈 다음 매년 한패를 동원하여 성을 하나씩 쌓아 화기를 상하지 않게 하라고 건의한 기사도 있다. 이러한 사정은 세종 28년 4월에 축성시기를 10월로 한정하고 수년지법에 따라 축성 기일을 가감하여 정함으로서 백성들의 부담과 고통을 줄이고자 하였다.

그리고 성종 8년 2월에 있었던 논의에서 양산성은 경주 경내의 여러 고을에서 쌓고 창원성은 진주 영내의 여러 고을에서 쌓으면 공역이 쉽게 이루어져 일이 쉽게 성취될 것이라고 하였고 이어서 성종 8년 3월에는 병조에서 아뢰기를 경상도의 창원·울산과 전라도의 부안 세 고을의 성은 본 고을에 살고 있는 백성으로 하여금 쌓게 하였는데, 1년에 쌓은 것이 2,3백 척에 불과하니 비록 수십 년에 이른다고 하여도 공역이 쉽게 진행되지 못할 것이니 양도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토목 공사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가까운 고을에서 장정을 보내어 기한을 두고 점차 쌓게 하자고 하였다.

이처럼 축성에는 한 고을의 백성만이 동원된 것이 아니라 인근 고을의 백성들도 동원되었는데 당시 진주성의 수축에는 진주의 주변에 위치하고 있던 경상남도의 서쪽에 위치한 사천, 함양, 단성, 하동, 곤양 등의 주민이 동원되어 진주성을 쌓고 자신들이 수축한 성벽 구간에 대하여 표시한 것이 지금 남아 있는 공북문 성벽 석각인 것이다.

한편, 공북문의 ‘拱(공)’은 ‘두 손을 맞잡아 가슴까지 올려 절하다’라는 뜻이고, ‘北(북)’은 북쪽이라는 뜻도 있지만 남면한 임금을 올려다보는 방향을 의미하는데, ‘拱立(공립)’이라는 단어는 ‘공경을 표하기 위하여 두 손을 마주 잡고 서 있다’라는 뜻이므로 ‘拱北(공북)’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하여 공손하게 절을 올린다.’는 뜻, 다시 말해서 ‘충성을 다하는 신하의 예를 표하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공북문’ 서쪽 성벽에 새겨진 글귀라고 하여 공북문 성벽 석각이라고 한다.

[건립경위]

진주성에 내성이 축조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 1603년(선조 31)에 병사 이수일김수가 수축한 성을 개축하면서 설치된 것으로, 공북문은 17세기 말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진주성 병풍도」에 의하면 공북문진주성 내성의 북문으로 홍예문 위로 2층의 누각을 올린 것으로 그려져 있고 이것은 진주박물관에 소장된 「진주성 병풍도」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진주성도」와도 동일하다. 그리고 『여지도서』의 기록에도 내성의 북문은 2층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북문은 공북문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진주성도에서 공북문은 성벽과 나란하게 위치하며 홍예의 높이는 성벽의 높이와 거의 같으며, 홍예 위로 이층의 누각을 올렸는데 누각은 정면 3칸이지만 2층은 1층보다 각 칸의 넓이를 좁히면서 올렸다.

진주성에 축조된 문 가운데 2층으로 누각을 올린 것은 내성의 공북문과 외성의 예화문(남문)이 있으며 공북문은 북쪽에 있는 왕을 바라보는 문으로 위엄을 갖추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다른 문보다 높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공북문의 바로 앞으로는 진무청과 중영이 자리하고 있어 공북문이 내성의 정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이 공북문은 조선시대 말에 훼손되었으나 1999년 경남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되었다.

[위치]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위치한 진주성공북문 성벽 서쪽 하단부에 있으며, 이 일대는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해당된다.

[금석문]

공북문 성벽 석각의 글은 ‘강희 19년(1680년, 숙종 6) 산 북쪽의 마병 소속의 초(哨)병력과 사천, 곤양, 하동, 단성, 함양 등 여섯 고을의 초병력이 힘을 모아 쌓다(康熙十九年 山陰馬兵中哨 泗川昆陽河東丹城咸陽 六官一哨)’라는 뜻이다.

[의의와 평가]

진주성을 수축하던 당시에 축성에는 여러 고을 사람들이 동원되었으므로 이를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며, 축성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으로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8.10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석각에 새겨진 ‘康熙十九年山陰馬兵中哨泗川昆陽河東丹城咸陽六官一哨(강희십구년산음마병중초사천곤양하동단성함양육관일초)’는 ‘강의 19년(1680년, 숙종 6) 산음 고을의 마병 소속의 초(哨)병력과 사천, 곤양, 하동, 단성, 함양 등 여섯 고을의 초병력이 힘을 모아 쌓다’로 해석된다. ->석각의 글은 ‘강희 19년(1680년, 숙종 6) 산 북쪽의 마병 소속의 초(哨)병력과 사천, 곤양, 하동, 단성, 함양 등 여섯 고을의 초병력이 힘을 모아 쌓다(康熙十九年 山陰馬兵中哨 泗川昆陽河東丹城咸陽 六官一哨)’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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