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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0557
한자 南鮮公論
영어의미역 Public Opinion of South Korea
이칭/별칭 중앙공중보
분야 역사/근현대,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문헌/연속 간행물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고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월간지
관련인물 정필화|정창화|강주수
발행인 정필화|정창화
판형 타블로이드판
창간연도/일시 1935년 1월 1일연표보기
종간연도/일시 1941년 1월 1일연표보기
총호수 65호

[정의]

1935년 1월 1일 진주에서 창간되었던 월간지.

[창간경위]

창간사에 ‘부(富)에 굴하지 아니하고, 세(勢) 위력에 동(動)하지 않고, 3군(軍)의 용(勇)에도 뺏기지 않으며 비록 요순에게 악이 있다면 악 그대로, 걸주(桀紂)에게 선이 있다면 선 그대로 추호의 편협 없이 공정하고 엄격히 판단하겠다’ 라는 굳건한 좌표를 명시하며 창건하였다.

[형태서지상의 특징]

8단의 타블로이드 4면이며, 본문 활자는 5호, 구독료는 10전(錢), 광고료는 1행에 50전이었다. 영남춘추와 달리 사진이나 컷을 싣지 않았다.

[내용]

『남선공론』은 창간 당시 엄정한 비판적 태도를 강조하며 창건하였으나, 특히 교육관계 기사를 관심 있게 다루었다. 진주에 있는 고등학교 졸업생 명단이나 입학자 명단도 게재하였으며, 입학안내, 생도모집 등의 광고도 함께 싣고 있어 교육관련 기사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말기에는 친일적인 요소가 짙어 일본신문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변천]

『중앙공중보』가 전신이며, 『중앙공중보』로 창간될 당시 발행인은 정필화(鄭弼和) 인쇄인은 강주수(姜周壽)였다. 1935년 12월 1일자부터 발행인이 정필화의 동생 정창화(鄭唱和)로 바뀌었고, 1936년 3월1일부터 제호를 『남선공론』으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매월 2회 발행체제로 들어갔다. 그 후 언제 폐간되었는지 자료 및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으나 현재 1941년 1월1일자(지령 65호)까지의 자료만이 남아 있어 그 후 바로 폐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 및 평가]

교육적인 문제를 많이 다루어, 당시 진주의 교육현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친일적인 요소가 짙긴 하지만, 『영남춘추』와 더불어 진주언론의 맥을 이어온 향토지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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