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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106
한자 烽燧
영어음역 bongsu
영어의미역 beacon fire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김유나

[정의]

높은 산 정상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밤에는 봉(熢: 횃불), 낮에는 수(燧: 연기)로써 급보를 전하던 통신방법.

[개설]

봉수는 전근대시대에 변경의 급보를 전달하는 동시에 해당 지역의 영진(營鎭)에도 알려 적의 침략에 대비했던 통신제도로서 민간통신으로는 활용되지 못했고 단지 군사통신으로만 사용되었다. 봉수제의 유래는 오래된 듯하며, 중국에서는 25~27년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에 이미 상당히 정비된 봉수제도가 있었고, 한국에서도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에 봉화(烽火)·봉산성(烽山城) 등의 기록이 보여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것으로 짐작되나 확실한 것은 고려 의종(毅宗) 이후부터이다. 그 후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4군 6진의 개척과 함께 봉수제는 크게 정비되고 발전된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봉수조직은 중앙 병조 소속의 무비사(武備司)와 지방 영진 관할하의 봉수대(烽燧隊)로 편성되어 있었다. 영진에는 장(將)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영에는 관찰사·병사·수사가, 진에는 수령이 겸임하여 직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봉수대는 경봉수(京烽燧: 목멱산 봉수), 내지봉수(內地烽燧), 연변봉수(沿邊烽燧)의 3가지로 조직되어 있었고, 각 봉수대는 오장(伍長: 경봉수는 五員)과 봉수군(烽燧軍)을 배치했다.

봉수조직의 최하층에 속했던 봉수군은 봉수대 위에 기거하면서 관찰·신호·전령 등을 맡았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었지만 국역부담에 있어서는 천인의 역에 종사하는 신량역천인(身良役賤人)으로 부근민(附近民) 가운데 차정함이 원칙이었다. 오장 또는 오원은 봉수군을 지휘·감독하며 봉수대의 근무상황을 수령에게 보고하고, 수령은 이를 받아 유사시에는 즉시, 무사시에는 월말마다 관찰사에게 보고하는 한편 매계월(每季月: 3, 6, 9月)마다 병조에 보고했다. 봉수가 끊어졌을 경우에 수령은 곧 그 사유를 병조에 보고해야 되는데 봉수의 양호 여부는 수령의 공과(功過)에 직결되었다. 경봉수에서는 변방으로부터 전달된 정보를 병조에 보고하며, 병조는 승정원에 보고하여 국왕에게 알렸다.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은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을 사용하여 횃불의 숫자에 따라 소식을 알렸는데 세종대에는 5구분법으로 체계화되었다. 1419년(세종1년)에 해상과 육상을 구별하여 평소와 다름이 없으면 1개의 홰를 올리고, 해안지방의 경우 왜적이 해상에 나타나면 2개의 홰, 해안에 가까이 오면 3개의 홰, 왜적이 상륙할 때는 5개의 홰를 올렸다. 육지의 경우 적이 국경 밖에 나타나면 2개의 홰,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개의 홰, 국경을 침범하면 4개의 홰, 우리 군사와 접전하면 5개의 홰를 올리도록 했다. 그러나 만일 적이 침입했을 때 안개·구름·비바람으로 인하여 봉수가 전달되지 않을 경우에는 화포(火砲)나 각성(角聲) 또는 기(旗)로써 알리거나 봉수군이 직접 달려가서 알리도록 했다.『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전국의 봉수망은 5대 기간선로로 구성되었으며, 전국의 봉수대는 총 610개소였는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제주목의 63개소가 더 있었다.

[진주의 봉수]

진주에는 망진산에 있는 망진산 봉수명석면 광제산에 있는 광제산 봉수가 있었다고 하는데, 광제산 봉수는 그 흔적만 약간 남아있고, 망진산 봉수도 1996년 8월 14일에 복원되었다. 망진산 봉수대는 조선 초기에 건립된 봉수대로서 진주 8경중 제 5경에 속한다. 고종 32년인 1895년 폐지되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우리나라의 통신수단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5개 직봉노선 가운데 동래 다대포진에서 목멱산(현 서울 남산)에 이르는 제2노선의 보조노선으로서 남해 금산과 사천 안점의 봉수를 받아 광제산 봉수대로 이어주는 곳이었다. 이러한 망진산 봉수대는 1894년 동학농민항쟁과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에도 사용되었으며, 일제강점기 때 훼손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진주문화사랑모임 등 민간단체가 중심이 되어 복원했다. 광제산 봉수대는 역시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동래에서 서울 목멱산 중앙봉수에 이르는 봉화선로를 연결하고 있었다. 이 봉수대는 남쪽으로는 망진산 봉수대와 북쪽으로는 단성의 입암산 봉수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현재는 봉수대 일부의 흔적만 남아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06.27 [진주의 봉수] 수정 '관제산봉수'를 '관제산봉수대'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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