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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178
한자 社倉
영어음역 sachang
영어의미역 village grana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임경희

[정의]

조선시대 각 지방 군현의 촌락에 설치된 곡물 대여 기관.

[개설]

사창은 중국에서 각 지방 행정단위인 ‘사(社)’에 창고를 세워 기근에 대비한 의창(義倉)과 남송의 주희(朱熹)가 실시한 사창법에 기원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제도들을 본받아 고구려 때는 진대법(賑貸法)을, 고려시대에는 의창·상평창 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조선시대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사창제도를 실시하였다.

사창은 태조 때 설치된 의창, 세조 때 설치된 상평창과 함께 조선시대 진휼책의 한 종류로서 의창 경영의 폐단에 따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제정배경 및 목적]

사창 설치의 배경은 의창 원곡의 부족과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군자곡의 감소를 막자는 데 있었다. 농민에게 환곡 정책의 일환으로 대여했던 의창곡은 이식을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고 이로 인해서 의창곡은 만성적인 적자를 면할 수 없었다. 여러 대응책이 실시되기도 했으나 의창곡의 원곡은 계속 부족해지고 진휼 대상자는 증가하는 모순으로 인해 의창제는 태종 10년(1410)에 폐지되었다. 이러한 의창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서 설치된 것이 사창제도이다.

[제정경위]

우리나라에서 사창이 처음 실시된 때는 1451년(문종 1)이었다. 이보다 앞서 1448년(세종 30)에 대구 지방에서 처음으로 사창을 설치·시험하였다. 그 후 문종 1년에 경상도 각 고을의 사창 설치 규정이 마련됨에 따라 결실을 보게 되었으며, 1461년(세조 7)에 사창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변천]

이러한 사창의 설치는 한정된 관곡(의창곡)을 효율적으로 운영해 궁핍한 백성에 대한 진휼을 계속하려는 국가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창은 원곡을 대여해 이식을 취함으로써 처음은 어느 정도 원곡의 감소를 막을 수 있었으나, 이자놀이에 중점을 둠으로써 점차 진휼기관이 아닌 국가적 고리대 기관으로 성격이 전락되었고, 그 결과 사창이 시행된 지 20여 년이 되는 1470년(성종 1)에 호조의 제의로 혁파되고 말았다.

끊임없이 사창제 부활논의가 있어 왔으나 정식으로 부활된 것은 1866년(고종 3)에 흥선대원군에 의해서였다. 뒤이어 1866년에는 조두순이 마련한 「사창절목」을 정부안으로 경기·삼남·해서 등 5도에 실시했는데, 이를 사환제(社還制)라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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