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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509
한자 驛院
영어음역 Yeogwon
영어의미역 Station Guesthouse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이수덕

[정의]

역은 전근대시대의 국가권력을 중앙정부와 지방에 효율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설치한 교통통신조직의 일종이고, 원은 고려·조선 시대에 출장한 관원들을 위해 각 요로(要路)와 인가가 드문 곳에 둔 국영 숙식시설의 일종이다.

[개설]

역(驛)

역은 우역(郵驛)이라고도 한다. 역제는 국가의 동맥으로서 군사·외교적 측면만이 아니라 교통·행정적 측면에서도 중앙집권국가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고려시대에는 대개 30리(里)마다 1개 역을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역장 2~3명, 역정호 7~75명을 배치했으며, 초기의 역제인 6과체제에는 제도순관(諸道巡官)이, 그 뒤에 시행된 22역도체제에는 공역서(供驛署)의 관할 아래 관역사(館驛使)가, 그리고 고려 말에는 역승(驛丞)의 지휘·감독 아래 역을 운영했다. 그러나 고려의 역제는 몽골의 간섭을 받으면서 몽골식 역참조직으로 개편되어 참(站)이라는 용어가 관(館)과 함께 역의 이름으로 통용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가의 발호로 인해 유흥경제가 파행적으로 운영되었다. 이때 권문세가들은 자신의 개인물품을 강제로 역도를 통해 운반했는데, 이로 인해 역마의 남승과 그에 따른 역호의 조잔 현상이 야기되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났다. 결국 역로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위화도회군 이후 신흥사대부와 결탁한 무인세력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면서 대대적인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역제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면서도 4군 6진 등 북방역로의 신설과 역의 합병, 역의 원근(遠近)에 따른 역도의 재편, 합배(合排)의 설치 등을 통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성종대의 『경국대전』 반포를 계기로 명실상부한 전국적인 역참 조직, 즉 41역도 500여 개의 역로망이 구성되었으며, 대부분 커다란 변동이 없이 구한말까지 존속되었다. 한편 조선 전기의 역제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그 기능이 거의 마비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 까닭은 말 값의 상승과 고역에 따른 역민(驛民)의 도망으로 역마(驛馬)를 확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역마의 남승과 역토지의 사유지화, 국가 기강의 해이로 인하여 역의 책임자인 찰방·역승 등의 작폐가 심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이후 역제의 복구문제가 계속 논의되었으며, 또 봉수제(烽燧制)가 군사통신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자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명(明)나라의 파발을 참고하여 마침내 군사 및 행정명령을 위주로 전송하는 파발제(擺撥制)를 성립시켰다. 1597년(선조 30)에 설치된 파발제는 기발(騎撥)은 20~25리마다, 보발(步撥)은 30리마다 1개의 발참(撥站)을 두어 전국에 모두 205개의 발참을 설치했다. 이러한 파발제는 서울-의주를 연결하는 서발(西撥), 서울-경흥을 연결하는 북발(北撥), 서울-동래를 연결하는 남발(南撥)의 3대로를 근간으로 하여 조직되었다. 파발의 조직은 전송방법에 따라 기발과 보발로 나뉘며, 지역에 따라 서발·북발·남발로 편성되었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기발은 말을 타고 전송하는데 25리마다 1개의 발참을 두어, 발장(撥長) 1명, 색리(色吏) 1명, 기발군(騎撥軍) 5명과 역마 5필을 배치했다. 보발은 도보로 전달하는데 30리마다 1개의 발참을 두고, 발장 1명과 보발군 2명을 배치했다. 이와 같이 조직된 파발제는 종래 역제가 담당한 기능 가운데 군사통신 만을 주로 전달했으며, 1895년(고종 32) 근대적인 전화·전보통신 시설이 설치되기 전까지 군사통신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역에 소속되어 그의 역을 담당한 사람을 역민(驛民) 또는 역속(驛屬)이라 한다. 대개 역에는 찰방·역승의 감독 아래 역장·역리·역노비 등이 배치되었으며 각 참에는 참리·일수·급주인·마부가, 관에는 관군·일수·조역백성 등 다양한 역민이 배치되었다. 역승·찰방은 역도의 크기에 따라 종9품 또는 종6품의 문관으로써 1명씩 배정되었으며, 역장은 역리 중에서 2~3명을 뽑았으며, 역리는 역의 대소에 따라 그 정원이 정해졌으나 실질적으로 일정하지 않았다. 역노비는 급주노비(急走奴婢)와 전운노비(轉運奴婢)로 편성되어 역의 대소에 따라 상등역에 50명, 중등역에 40명, 하등역에 30명씩 배정되었다. 일수는 급사(給事) 역할을, 마부·관군은 역마보급에 관한 업무를 맡았으며, 급주인은 뜀박질하여 문서를 전달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민은 고역으로 인하여 도망하는 사례가 많아 역 부근의 보충군(補充軍)이나 정군(正軍)·향호(鄕戶) 또는 일반 백성들을 차출하여 역민을 보충하는 조역(助役) 정책이나 봉족 등의 급보(給保) 정책을 통하여 확보하기도 했다.

한편 역마는 역의 주된 운송수단이기 때문에 그의 확보 문제가 중요시되었다. 역마는 용도에 따라 승마용 기마(騎馬)와 운반용 태마(馬) 또는 복마(卜馬)로 구분되고 크기에 따라 대마·중마·소마 또는 상등마·중등마·하등마로 구별하여 지급되었다. 역마의 관리는 찰방의 책임 아래 병방역리(兵房驛吏)가 담당했으며, 마적(馬籍)을 작성하고 말의 비척과 조련상태를 점고했다. 역마를 이용할 때에는 상서원에서 발급한 마패에 근거하여 『경국대전』 급마 규정에 따라 역마를 지급했다. 이러한 역마 지급은 고려 원종 때에 포마법(鋪馬法)의 제정과 함께 제도화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1410년(태종 10) 포마기발법(鋪馬起發法)과 마패법(馬牌法)을 실시하면서 점차 확립되었다. 그런데 역을 원만하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우선 역마의 확보가 마련되어야 했다. 조선 초기에는 역리·역졸 등의 역민에게 마위전(馬位田)을 지급하여 자체적으로 확보하거나 목장마 등 관마(官馬)를 지급했다. 그러나 교역확대에 따른 역호의 조잔, 역마 남승의 폐단 등으로 원래의 역호에 의한 역마 보충은 많은 제약이 따랐다. 이에 일반 민호에게도 마위전의 경작권을 주고 입마하게 하는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를 보호 마호입역(馬戶立役)이라 한다. 또한 역마의 부족시 민간인의 말을 사서 보충하는 쇄마고립(刷馬雇立)을 실시하기도 했다.

역의 관할에 있어 고려시대에는 병조 직속의 공역서(供驛署), 조선시대에는 승여사(乘輿司)가 관리했으며, 실제로는 각 역도별로 찰방과 역승을 두어 총괄했다. 역승·찰방의 기원은 고려 초기의 제도관(諸道官) 또는 역순관(驛巡官)에서 비롯되어 제도관역사(諸道館驛使)를 거쳐 고려 말에는 역승(驛丞)이라 했고, 조선 초기에 각기 병행되어 존속되다가 1535년(중종 30)에 찰방으로 일원화되었다. 역승·찰방의 정원은 『경국대전』에 따르면 경기도·충청도·전라도에 각 3명씩, 경상도 찰방 5명, 역승 6명, 강원도 각 2명씩, 황해도 찰방 2명, 역승 1명, 영안도 찰방 3명, 평안도 찰방 2명이었다.

한편 역의 주요기능으로 ① 국가명령이나 공문서의 전달, ② 내외 사신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③ 관수 물자의 수송, ④ 내외인의 왕래 규찰 및 죄인 체포·압송, ⑤ 유사시 국토방위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변경의 급박한 군사정보나 외교문서 등의 전달은 그 완급에 따라 국익에 미치는 영향이 컸기 때문에 전달과 보안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이와 같은 공문서의 전달방식에는 가죽 부대에 문첩(文貼)을 넣어서 전달하는 현령전송(懸鈴傳送)과 피각전송(皮角傳送)이 있다. 현령전송은 일의 완급에 따라 3현령·2현령·1현령을 사용했으며, 피각전송은 완급에 따라 통과하는 역의 수를 달리했다.

우리나라의 역제는 중앙정부의 명령을 지방에 전달하거나 각 지방의 산물을 다른 지역으로 운반하는 교통·통신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며, 교통행정상의 요지에 역촌을 형성하여 지방도시가 발달하고 상품경제의 발달을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원(院)

원은 고려·조선 시대에 출장한 관원들을 위해 각 요로(要路)와 인가가 드문 곳에 둔 국영 숙식시설로서 설치시기·운영방법 등은 확실하지 않다. 각 주(州)·현(縣) 내의 관(館)과는 구별된다. 건물은 원우(院宇)라고 했다. 원은 지방통치와 교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시대에는 원이 사원에 부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서로 동일시되기도 했으며, 관리는 승려들이 맡아하기도 했다. 이러한 원들은 주로 교통상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어 교역의 중심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보면 개경과 가까운 곳에 도적이 자주 출몰하자 인명과 통과물품을 보호하기 위해 원을 세운 듯하다. 원의 관리는 각 지방에서 맡았으나, 실제로는 소홀함으로 인해 조폐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후 조선시대 들어 1392년(태조 1) 9월에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의 상소로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원이 수리·건설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원우는 고려시대의 사원 또는 선원(禪院)이 원으로 전환되거나, 개인소유의 주택 또는 누정(樓亭)을 개조한 것이 많았다. 그외 관가 또는 개인이 주관해 원우를 신축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은 공무를 위한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상고(商賈)나 여행자의 숙식소로 존재했다. 또한 국왕이 지방을 순시할 때나 피난길에 이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각도 관찰사가 도내의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원에서 점심을 먹거나 마필(馬匹)을 교체했으며, 신구 감사가 도계(道界) 부근의 원에서 교대하기도 했다. 이 원우의 관리는 서울 성저(城底:도성 10리 이내의 거리)의 원은 5부(部)에서, 지방의 원은 수령이 부근에 사는 주민을 원주로 삼아 이를 담당하게 했다. 그리하여 한성부와 관찰사가 이를 감독하여 수령의 근태 여부를 조사해 그들의 인사자료로 삼기도 했다. 한편 역원(驛院)의 대로(大路)·중로(中路)·소로(小路)는 1445년(세종 27) 국용전제상정(國用田制詳定) 때 주(州)·부(府)·군(郡)·현(縣)의 대로·중로·소로와 함께 규정되었다. 대로는 서울에서 죽산(竹山)·직산(稷山)·개성부(開城府)·포천(抱川)까지였다. 이곳은 5호(戶)를 원주로 임명했다. 중로는 죽산에서 상주(尙州), 진천(鎭川)에서 성주(星州), 직산에서 여산(礪山), 개성부에서 중화(中和), 포천에서 회양(淮陽), 서울에서 광주 도미진(渡迷津)까지로 3호를 원주로 임명했다. 소로는 대로·중로 외의 나머지 도로이며, 2호를 원주로 삼았다. 그런데 『경국대전』에는 중로의 여산이 전주(全州)로, 광주 도미진이 양근(楊根)으로 바뀌었다. 원주들은 잡역을 면제받았으며, 운영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원전(院田)을 지급했다. 한편 서울 성저의 동쪽·서쪽·남쪽 지역에는 보제원(普濟院)·홍제원(弘濟院)·제천정(濟川亭)·사평원(沙平院) 등 4개의 큰 원이 있었다. 이러한 원은 세조 때 세워졌다. 보제원은 동대문 밖 3리(三里) 지점에 위치하며, 3월 3일과 9월 9일에 기로(耆老)와 재추(宰樞)를 위해 사연(賜宴)을 베풀던 곳이다. 그리고 홍제원은 사현(沙峴)의 북쪽 들에 있었고,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는 날에 머물며 옷을 바꾸어 입던 곳이다. 제천정은 한강의 북쪽 언덕에 위치해 한강을 유람하는 중국 사신이 맨 먼저 들른 곳으로 고관들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이들이 날마다 모여들었다. 이곳은 한강의 도승(渡丞)이 관리했다. 마지막으로 사평원은 한강의 남쪽 모래언덕에 있었는데, 고려시대에는 사평진(沙平津)이었다. 이곳은 날이 저물어 한강을 건너지 못한 나그네들이 유숙하던 곳이다. 그밖에 성저지역에는 남산 남쪽에 이태원(梨泰院), 전곶교(箭串橋) 서북쪽에 전곶원이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초기 전국의 원은 1,310개소로 한성부 4, 개성부 6, 경기도 117, 충청도 212, 경상도 468, 전라도 245, 황해도 79, 강원도 63, 함경도 37, 평안도 79개소에 이르렀다.

한편 서울에 기근이 들었을 때는 성저에 소재하는 원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해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휼하기도 했다. 원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차차 그 기능이 상실되어갔으며, 오히려 민간에서 운영하는 기관들이 그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그로 인해 차차 원은 쇠락하여 그 기능을 역에 넘겨주거나 주막 또는 주점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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