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의암별제 가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716
한자 義巖別祭歌舞
영어의미역 Uiambyeolje Performance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무형 유산,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작품/무용과 민속극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김선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가무
작가(원작자) 정현석(鄭顯奭)
창작연도 1868년
초연연도/일시 1868년연표보기
초연장소 경상남도 진주시

[정의]

의암(義巖) 논개(論介)를 기리는 의암별제에서 행해지는 노래와 춤.

[개설]

의암별제는 매년 음력 6월에 길일(吉日)을 택하여 기생들만이 치른 대규모 의식으로, 악공을 제외하고 제관(祭官) 등 모든 의식을 여자(기생)들이 주관하는 점과 선비들의 음악인 정악(正樂)을 사용한다는 점을 특징으로 하는 행사이다.

조선시대 종묘(宗廟)에서 역대 임금을 제사지낸 종묘대제(宗廟大祭)나 문묘(文廟)에서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성인들과 한국의 유학자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제외하고서 이처럼 음악과 노래, 춤이 어우러진 제사의식을 치른 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의암별제에서 행해지는 노래와 춤을 의암별제 가무라고 한다.

[제작경위]

1868년(고종 5년) 당시 진주목사이던 정현석은 진주병사(경상우병마절도사)와 의논하여 논개의 사당을 다시 중건한 뒤, 춘추상제와 별도로 매년 6월중 길일을 택하여 논개에 대한 제향을 실시토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의암별제였다. 기생의 문화와 국악에 관심이 많았던 정현석에 의해 논개에 대한 불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제의와 가무로서의 의암별제가 시작된 것이다.

[공연상황]

1868년 첫 제례 때 300명의 기생들이 진행하는 엄숙한 제례의식과 악·가·무 즉 의암별제 가무의 광경은 가히 장관이었다고 전해진다. 1893년(고종 30년) 진주성 함락 300주년을 맞아 열린 의암별제에는 수 천 명의 구경 인파가 몰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내용]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 음력 6월 진주성 함락 직후 촉석루 아래 바위 의암(義巖) 위에서 왜장(倭將)을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 들어 함께 죽은 의기(義妓) 논개(論介)를 추모하는 내용이다.

[구성]

의암별제는 음악, 춤, 노래가 동시에 어우러져 행해지는데, 크게 10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제찬을 갖추어 촉석루에 차려 놓는다. 둘째, 채화를 그릇마다 꽂아 놓는다. 셋째, 헌관 이하 여러 제관은 예복을 갖추고 촉석루 아래에 대기한다. 넷째, 영신악이 연주되는 동안 영신례(迎神禮)를 행한다. 다섯째, 상향(上香)의 음악과 노래와 춤과 함께 예를 진행한다. 여섯째, 초헌(初獻)의 음악과 노래와 춤과 함께 예를 진행한다. 일곱째, 아헌(亞獻)의 음악과 노래와 춤과 함께 예를 진행한다. 여덟째, 종헌(終獻)의 음악과 노래와 춤과 함께 예를 진행한다. 아홉째, 의암별곡과 별무에 맞추어 사신례와 음복례와 망요례를 행한다. 열째, 제례가 끝나면 여흥가무로 이어진다.

[의의와 평가]

의암별제는 우리나라에서 그 전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여성을 위한, 그리고 여성에 의해 행해지는 제례로서 어디에도 얽매지 않은 독창적인 형식의 행사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