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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형평청년전위동맹' 사건 조작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786
한자 日帝-衡平靑年前衛同盟-事件造作
영어의미역 "Social Equality Youth Front Alliance" Fabrication Incidence by Japanese Imperialists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형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조작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933년 1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36년 11월 25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광주광역시
발생(시작)장소 광주광역시
관련인물/단체 이동안(李同安)|서광훈(徐光勳)|신점석(申點石)|박평산(朴平山)

[정의]

1933년 1월 청년형평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일제가 전라남도 광주형평청년회를 비롯한 청년회원들을 공산주의운동가로 조작한 사건.

[개설]

일제는 형평운동 확산과 사회단체와 연대를 적극적으로 경계하고 있었다. 혁신파가 주도권을 장악한 이래 형평사는 고려혁명당사건과 같은 민족해방운동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녔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동시에 형평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책은 이 사건으로 귀결되었다.

[역사적 배경]

지사와 분사 활동을 지원하는 형평청년회 활동가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사회운동가로서 위치를 확고하게 차지하는 등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형평사 해소문제에 대해 상이한 입장이었으나 사회운동단체와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었다. 19230년대 초반 혁명적 농민운동·노동운동과 연계는 식민당국자를 긴장시키는 요인이었다. 형평운동 고립과 해소 방안은 형평운동전위동맹사건 조작하는 계기였다.

[경과]

전라남도 광주지역 신선문·문재귀 등 젊은 형평운동가들은 1933년 1월 24일 경찰에 구금되었다. 이에 대한 보도는 7개월이 경과할 때까지 거의 없었고, 단지 공산주의운동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될 뿐이었다. 불법으로 구금되어 심문을 받은 인원은 10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형평사 진주지사 사원들도 일부 연행·구금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 중 이동안·박경식(朴敬植) 등 14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또 51명은 불구속 상태로 검찰에 넘겨진 반면 나머지는 석방되어졌다.

[결과]

공산주의운동에 가혹한 통제를 가하던 일제도 이 사건 처리에 소극적이었다. 구속자에 대한 에비심문은 1년 5개월이나 지연하다가 재판에 회부한 후 첫 번 공판은 1935년 11월 27일에야 시작하였다. 체포된 지 4년이 지난 1936년 11월 25일 구속자 전원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당시 형평사는 대동사로 개편되는 등 일제 식민정책에 부응하는 친일단체로 전락한 이후였다.

[의의와 평가]

만주사변 이후 전선 확대는 군수품인 가족제품의 원활한 공급이 필요한 시기였다. 이를 위한 형평사원의 긴밀한 협조는 군수품 조달의 관건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형평사 광주지사는 수육조합 발족을 둘러싸고 첨예한 내부 갈등을 표출하였다. 신점석 등을 비롯한 청년층은 수육조합을 부유한 사원들 이익을 위한 단체라고 격렬한 비판을 가하였다. 이에 젊은 활동가들을 수 개월에서 4년이라는 격리를 통하여 저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형평사를 개편할 수 있었다. 일제의 민족운동에 대한 탄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12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관련인물/단체 이동안(李同安)|서광훈(徐光勳)|신점석(申點石泳)|박평산(朴平山) ->관련인물/단체 이동안(李同安)|서광훈(徐光勳)|신점석(申點石)|박평산(朴平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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