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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선형평대표자회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851
한자 全朝鮮衡平代表者會議
영어의미역 Joseon Social Equality Representatives Council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대전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형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회의
발생(시작)연도/일시 1923년 11월 7일연표보기|1924년 2월 10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24년 2월 11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충청남도 대전군|경상남도 부산시
관련인물/단체 강상호|장지필|오성환|신현수|이학찬|조귀용|하석금|도지마예츠오[遠藤哲男]

[정의]

일제강점기 사회운동단체인 형평사의 운동노선 전환의 계기가 된 회의.

[개설]

1923년 4월 진주에서 조직된 형평사는 창립 10개월만에 12개 지사와 67개 분사가 설립되는 등 일제강점기 사회운동단체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강상호·신현수·하석금 등 경상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과 전라·충청·경기·강원도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장지필·조귀용·오성환 등이 운동노선과 주도권 장악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1923년 11월 7일 대전과 1924년 2월 10일-11일 부산에서 개최된 전조선형평대표자회의를 계기로 운동 주도권은 장지필·오성환 등에 의하여 장악되었다.

[역사적 배경]

형평운동 확산으로 전국적인 조직체계 운영의 필요성은 증대되었다. 이에 도 단위로 지사를 두고, 군이나 주요 마을을 단위로 분사를 설치하였다. 1923년 6월부터 지사 창립축하식을 거행하는 등 일반인의 관심과 지원으로 형평운동은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전국적인 조직 확대는 지도자 상호간 운동노선을 둘러싼 대립·갈등을 심화시켰다.

[목적]

대외적인 명분은 형평운동 확산을 통한 백정에 대한 차별대우 불식이었다. 구체적인 방안은 본사의 대전이나 서울 이전과 사원들 경제적인 안정 등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이는 대외적인 슬로건에 불과하였고, 실상은 각종 사회단체와 연대를 통한 민족해방운동의 적극적인 동참에 있었다.

[발단]

‘혁신파’의 중심인물인 장지필·오성환·조귀용 등은 형평운동 활성화를 위한 대안으로 1923년 11월 ‘대전대회’에서 시세변화에 부응한 운동노선 재정립을 내세웠다. 그러나 당시 주도권을 장악한 ‘진주파’인 강상호·천석구·이학찬 등에 의하여 이러한 문제는 크게 부각될 수 없었다. 1924년 2월 부산에서 개최된 형평사 전조선임시총회는 이러한 인식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계기였다.

[경과]

1924년 2월 개최된 부산대회는 49개 군 대표 3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논의된 핵심 내용은 사원자제의 신학기 입학권장, 사원 교육을 위한 강연회 개최, 신문 잡지의 구독, 단기강습소 개최, 본사의 대전 이전 문제 당분간 연기, 창립1주년기념식 거행, 일본 수평사와 조선총독부와 관계 개선 등이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장지필·오성환·천명순 등은 귀경하는 도중 천안에서 별도 모임을 통하여 형평운동 혁신을 위한 독자적인 조직체 발기를 결의하였다. 이어 3월 12일 천안에서 형평사 혁신회 창립총회를 개최함으로써 사실상 본사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전조선형평대표자회의는 종래 계몽적인 활동에 치중한 형평운동의 노선에 변화를 초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즉 사원 교양 함양이나 사원 자제 교육을 위한 강습소·야학 운영, 잡지 발간, 신문구독 권장 등 계몽운동은 병행되었으나, 노동공제회·북성회 등 노동단체·사상단체·청년단체 등과 제휴하여 통합된 계급운동 또는 민족운동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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