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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874
한자 鄭相珍
영어음역 Jeong Sangjin
이칭/별칭 鳥川相珍,상진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형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친일파
출신지 경상남도 진주시
성별
생년 1878년연표보기
몰년 1950년연표보기
본관 연일(延日)
초명 우용(佑鎔)
대표경력 진주전기주식회사 이사와 사장|도청이전방지동맹회 진정위원|삼천포주조주식회사 사장|양남약주주식회사 사장

[정의]

일제강점기 진주지역을 대표하는 자산가이자 친일파.

[개설]

본관은 연일. 초명은 우용, 자는 상진. 1878년 출생하여 경상남도 진주군 봉정동에서 성장하였다. 1880년대 후반부터 상업에 종사하여 3천석에 달하는 부를 축적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주로 수산물·미곡·소금 등을 거래하여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빈민구휼과 육영사업을 지원하는 등 주민들로부터 중망을 받았다.

1920년대 진주를 대표하는 노동야학도 그의 주도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1916년 평거면 주민들의 ‘시혜불망비’ 건립은 이를 반증한다. 1920년을 전후로 진주전기주식회사 감사 겸 대주주, 진주토지건물주식회사 이사, 경남도청 이전방지 동맹위원회 실행위원,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 발기인, 진주정미주식회사 사장, 영남약조주식회사 취체역, 진주합동운송주식회사 취체역 등 진주지역을 대표하는 실업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공로로 여러 차례 일제로부터 표창과 상장을 받았다. 해방 후 미군정 진주부 고문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1950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본격적인 친일활동은 진주 유일의 내선상공업체 모임인 실업춘추회의 가입에서 시작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진주 유지들로 구성된 애국비행기 진주호 헌납회에 가입하여 5천원을 기부하였다. 이듬해 2월 ‘진주군민의 애국결정체’라는 이른바 ‘애국 제214호 연락기’를 일제에 헌납하였다.

1939년 『조선시보』에 ‘황군의 대승의 봄을 맞이하다’라는 시국 광고를 게재하는 등 일제의 중국 침략을 옹호하고 나섰다. 이러한 신문광고는 각종 기념일 때마다 반복하여 게재하여 민족말살정책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친일활동은 농촌에서 농가후생과 증산직역봉과·멸사봉공을 강조하는 경남지주봉공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군인원호회에 대한 3천원 기부와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도 이러한 목적과 무관하지 않다.

[상훈과 추모]

일제 홍도회(弘道會)로부터 교육과 산업 방면에 대한 공로로 표창을 받았으며, 1933년 2월 기원절을 맞아 빈민을 구제한 공로로 경상남도지사로부터 덕행상을 받았다. 또한 조선총독부 시정25주년기념 민간공로자 표창으로 은잔 1세트를 받는 등 일제로부터 여러 차례 포상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정상진은 일제강점기에 각종 청년단체에 대한 지원은 물론 사립학교 발기인과 야학 후원회장을 역임하는 등 진주지역 문화계몽운동에 대한 지원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동시에 자기합리화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일제와 적절한 밀월관계나 빈민에 대한 구휼과 각 단체 지원 등 기부행위는 이러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일제로부터 임명된 각종 명예직이나 고문직 등은 이를 반증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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