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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여학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879
한자 柴園女學校
영어의미역 Siwon Girls' School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봉래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판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학교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봉래동
설립연도/일시 1925년 1월연표보기
폐교연도/일시 1939년 7월 31일연표보기
설립자 커렐(Dr. Hugh Currel)
교장 시넬리
총졸업횟수 14회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시 봉래동에 있었던 여자 교육 기관.

[설립경위]

1905년 서양인으로는 진주에 처음으로 정착한 호주 선교사 커넬(Dr. Hugh Currell) 부부가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학교 설립에 노력해오던 중 1907년 9월 3일 당시 진주군 대안면 2동에 있던 예수교예배당(현 진주시 봉래동 진주교회)에서 개교하였다.

[변천]

1907년 9월 3일 진주군 대안면 2동 예배당에 사립정숙여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개교 당시 이 학교에서는 성경·조선어·지리·역사·산술·한문·습자·침봉 등을 가르쳤다. 1909년 8월 31일에는 안동학교와 정숙여학교를 통합하여 사립 광림학교(光林學校)로 인가받았다가 1924년 11월 5일 정식 여학교로 인가를 받아 1925년 1월 초대 교장 시넬리의 이름을 따서 시원여학교라 하고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광주학생항일운동 후인 1930년 1월 18일 조회를 마친 후 학생들은 교실에 입실하지 않고 크게 동요하여 항일운동의 일보 직전까지 갔지만 학교와 경찰당국이 엄격하게 통제하여 더 이상의 항일운동은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후 1939년 6월 신사참배 거부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자진 폐교하라는 공문을 접수받자 동년 7월 31일 호주선교회는 폐교신청서와 기독교의 자유에 관한 탄원서를 함께 제출하고 폐교하였다. 당시 시원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303명(1939년 2월 기준)은 진주공립제2심상소학교(晋州公立第二尋常小學校)[현 봉래초등학교 전신]의 수정분교(水晶分校)[현 수정초등학교 전신]로 모두 편입되었다.

해방 후 시원여학교는 재개교하지 못했으며, 학교 건물마저 한국전쟁 중 미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타서 사라지고 말았다. 건물은 현재의 진주시 수정동 1통 2반과 3반 주택가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학생현황]

학생은 주로 옥봉리교회[현 진주시 봉래동 진주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의 딸들이었는데, 개교 당시 학생수는 15명이었고, 초등과정 즉 여자초등학교 수준이었다. 1914년 제1회 졸업생으로 1929년까지 16회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입학정원은 초기에 15명에 불과했지만 1936년 신학기에는 50명으로 증가하였다.

[시설현황]

1909년 8월 배돈병원(현 진주시 봉래동에 위치) 뒤편에 있는 묘지 빈터에 건평 30평의 목조기와 교실 1개동을 지었다. 이후 학생수가 계속 늘어나 독립된 학교 건물이 필요하자 호주선교회는 옛 광림학교 운동장 부지에 목조 2층 120평짜리 새 교사를 건축하였다. 1924년 말 운동장을 갖춘 지금의 수정동 새 교사로 학교를 이전하고 학교 발전의 기틀을 잡았다. 학교 운영비는 호주총회 전도국 부인회에서 부담하였다.

[교직원 현황]

1907년 사립정숙여학교의 교장은 거열휴 목사 부인이었으며, 교사로는 거열휴 목사, 선교사 시넬리 등이 활동하였다. 1925년 시원여학교의 실직적인 설립자이자 초대교장은 시넬리였으며, 1934년 정석록이 교장이 됨으로써 조선인 교장시대를 열었다.

[의의와 평가]

시원여학교는 기독교계 여학교로서 진주 지역 여성교육기관의 효시가 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여성들의 교육과 문맹퇴치에 전력을 다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항거하여 민족정신을 끝까지 지켜낸 교육기관으로서 높이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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