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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921
한자 朝鮮時代
영어음역 Joseon Sidae
영어의미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백태남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연혁]

1392년(태조 1) 진주를 진양이라 하고 태조현비의 내향이므로 목을 높여서 진양대도호부라 개칭, 진양대도호부사를 두었다. 1402년(태종 2) 진양을 진주로 고치고 대도호부를 목으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의 대대적 개편 때 진주는 목으로서 정3품의 목사가 배치되고, 그 아래 판관(종5품)과 교수(종6품)를 두었다. 1416년에는 전국을 8도로 나누었는데, 이때부터 진주는 경상도에 속했다. 1519년(중종 14) 경상도를 좌·우도로 나누고 진주목은 경상우도에 영속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7년여의 참혹한 전란 끝에 황폐화된 지역이 많아지자 농촌의 말단 조직인 이(里)의 통폐합이 이루어졌는데, 진주지역은 전란 전의 108개에서 전후 62개로 통합되었다.

1895년(고종 32)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나누는 가운데 진주는 진주부의 영(營)이 설치되어 관찰사를 두었고 진주목진주군으로 고쳐져 군수를 두었다. 1896년에 13도제(道制) 실시로 경상남도의 진주군이 되어 경상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하동군, 고성군, 진해군, 함안군, 남해군 등에 일부 면이 편입되면서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다.

[정치와 군사]

성종대에 경국대전이 마무리되면서 대전 체제로 중앙과 지방의 국가조직 정비되었다. 이 당시 진주는 전국 20목(牧) 중 하나로 경주, 상주, 성주, 안동과 더불어 경상도에서 가장 유력한 지방 거점도시였다. 진주목에는 목사가 파견되어 행정권, 경찰권, 군사권을 통제하며 지방 정치의 핵심으로 기능하였다.

조선 초기의 군제는 1464년(세조 10)을 전후하여 정비되었다. 이때 중앙은 5위로 구성되었는데, 경상도 지역은 용양위(龍驤衛)에 소속되었다. 용양위는 중부에 경동부(京東部)와 대구 군사(軍士), 전부에 김해 군사, 후부에 상주·안동 군사, 좌부에 경주 군사, 그리고 우부에 진주 군사가 소속되어 있었다. 이후 군제는 명칭과 제도가 변화하다가 진관(鎭管) 체제로 정비되었다. 이때 진주진관의 진주목사는 경상우병영에 소속되어 합천·초계·함양·곤양 군수를 통솔하고, 그 아래로 진주판관과 거창·사천·남해·삼가·의령·하동·산음·안음·단성 현감을 통솔하였다. 이렇게 진주는 경상도의 중요한 거점도시였고, 호남으로 들어가는 요충지로서 연안지역 왜구 방비에도 중요한 곳이었다.

임진왜란 후 진관체제가 유명무실화되고 5군영이 차례로 설치되어 숙종 때 정비되었고, 지방에는 속오군(束伍軍)이 설치되었다. 이때 진주에는 경상우도 우영장이 배치되어 진주·하동·함양·거창·곤양·합천·초계·사천·남해·단성·산청·의령·삼가 등 의 속읍을 거느렸다. 이처럼 진주는 전기와 마찬가지로 후기에도 그 중요한 군사적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경제]

조선시대에는 농업을 기간으로 하면서 상업, 수공업 등의 산업을 발달시켰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는 진주목의 땅이 기름지다고 하고 있는데 당시 진주목의 간전(墾田)은 1만 2천 7백 30결로, 논이 조금 적은 편이었다.

진주에서 생산된 주요 농산물은 오곡과 조·메밀·감·배·석류·뽕나무·삼[麻]·목면(木綿) 등이었고, 꿀[黃蠟]·녹포(鹿胞)·문어·은구어·표고버섯·석이[石茸]·송이버섯·지초·작설다(雀舌茶)·자리[席]·죽피방석(竹皮方席)·가는대[篠]·왕대[簜]·칠·종이·돼지털·사슴가죽·노루가죽·여우가죽·수달피(水獺皮)·산달피(山獺皮) 및 약재인 천문동(天門冬)을 공물로 바쳤다. 우무[牛毛]·세모(細毛)·청각(靑角)·미역·해삼 등은 이 지역의 특산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 김양촌(金陽村)과 강주포(江州浦) 두 곳에 어량(魚梁)을, 곤양(昆陽) 경계에 염소(鹽所)를, 목제리(目堤里), 중전리(中全里), 월아리(月牙里)에 자기소(磁器所)를, 유등곡(柳等谷)과 반룡진(盤龍津)에 도기소(陶器所)를 갖추어 지역의 수요를 충당하였다.

16세기 이후로 농지가 확대되고 상업이 발달하는 등의 변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지역에서는 새로운 관개기술인 보의 축조 및 이용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강변 저지지역에 새로운 경작지가 확장되어 가고, 이앙법에 의한 농경이 어느 지역보다도 앞서서 이루어졌다.

상품경제의 발달에 있어서도 진주지역은 예외가 아니었다. 19세기 초 진주목 지역에도 장시가 번성하여, 진주관아 근처의 읍장을 비롯해서 덕산장, 문암장, 수곡장, 대야천장, 안간장, 북창장, 소촌장, 반성장, 엄정장, 만가장, 영현장, 사일장 등 13개의 장이 섰다. 진주지역 내에서는 거의 매일 장이 설 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여기저기 장이 겹쳐서 섰다.

또한 진주목 관하에는 서부경상남도 지역 일부 고을의 조세를 모아 전라도·충청도의 앞바다를 통해 서울까지 운반하는 가산창(駕山倉)[진주 남쪽의 부화곡리, 현재 사천군 축동면 가산리]이 있었다. 가산창은 영남 지역 3개의 조창(좌·우·후 조창) 중의 하나로서, 진주·곤양·단성·사천·고성·의령 등 여섯 고을의 전세와 대동미를 거두어 들여 서울로 운반하면서 물산의 출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향촌사회]

조선 전기 1477년(성종 8) 공조판서 양성지가 올린 차자를 보면 우리나라의 만가지읍(萬家之邑)을 운위하고 있는데 경주, 평양이 으뜸, 나주, 남원이 다음이며, 전주, 진주가 또 그 다음이라고 되어 있다. 성종 당시에도 진주 호수는 10,000호를 상회하는 전국 6대 거읍 중 하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진주의 토성(土姓)으로 정(鄭)·하(河)·강(姜)·소(蘇)를, 입주(立州) 후(後)의 성으로, 유(柳)·임(任)·강(康)을 거론하고 있다. 이후 성종대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이러한 성씨 구성은 거의 변동이 없어 이 시기까지는 새로운 인구 유입에 따른 지역사회의 변동이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 편찬된 『진양지』에서는 전체 호수가 3,620호로 기재되어 인구의 급감을 보이고 있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진주지역이 엄청난 피해를 당한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조선의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국권이 안정되고 지방에 향약(鄕約)이 실시되자 유향소(留鄕所)가 점차 유력한 향촌의 지배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 지방 사족과 유림을 중심으로 서원(書院)과 사우(祠宇)가 다수 건립되면서 향촌지배체제는 더욱 안정되어갔다. 진주지역에도 창렬사·진주 남악서원·동산재·충의사·진주 도통사·용강서당·은열사 등 20여개의 중요한 사우들이 건립되어 선현의 충렬과 학덕을 기리고 있다.

[교통과 통신]

조선 초기 진주목 관내 역들은 역승(驛丞)이 관할하던 소촌도(召村道) 소속이었다. 이 당시 진주와 관련된 도로는 제6로인 서울-통영 간 도로로, 그 경유지는 수원, 직산, 성환, 천안, 공주, 은진, 삼례, 전주, 남원, 진주였다. 이 경유지에는 여관 역할을 하던 원(院)을 두었는데, 진주에는 17개소의 원이 있었다. 조선은 후기에 들어오면서 세미(稅米)의 양이 크게 증가하여 조운을 위한 조창(漕倉)이 설치되었는데, 경상도 지역에는 창원의 좌조창, 밀양의 후조창, 그리고 진주의 우조창이 설치되었다. 진주의 우조창에는 20척의 배가 배치되어 8개 읍의 세미를 관장하였다.

통신 기능의 봉수제(烽燧制)는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국 5개의 직봉(直烽) 중 진주는 동래와 서울을 연결하는 제2직봉에 속하였으며, 2개의 간봉이 있었다. 이 중 하나는 고성-진주-충주-서울 목멱산(남산)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해-진주-사천-단성-삼가-충주-서울 목멱산(남산)이었다.

[학문과 사상]

조선시대 진주는 영남학파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특히 이황과 더불어 영남학파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남명 조식이 활동한 근거지로서 남명학파의 본산지로 자리 잡았다. “敬(경)”과 “義(의)”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 학풍의 남명학은 이후 경상우도의 학문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각재(覺齋) 하항(河沆)과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이들의 뒤를 이은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과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등이 조식의 학문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또한 임진왜란 때에 진주 지역에서는 의병장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이 때 활약하였던 김면(金沔), 곽재우(郭再祐),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 등도 조식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이들이다. 조식의 학문에 나타나는 실천성이 국난을 맞아 적극적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사건]

1. 임진왜란과 진주

1592년 조선은 일본의 침입으로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는 초유의 전란을 맞게 되었다. 관군의 활동과 더불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을 물리치고 국난을 극복하였다.

진주는 경상우도의 핵심지역으로 이 지역 병마의 주력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었고, 당연히 일본군의 조선 공략의 표적이 되었다. 1592년 9월에 일본군이 진주성에 침입하자 목사 김시민(金時敏)의 지휘 하에 관민이 일치단결하여 적을 격퇴하였으나 김시민은 적의 유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이듬해 왜군이 지난해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다시 진주성에 침입하였는데,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등 여러 장수와 읍민들이 왜군과 끝까지 싸웠으나 마침내 성이 함락당하여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때 의기 논개(論介)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으니 촉석루 옆에 서 있는 의기사(義妓祠)는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임진왜란 후 160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영을 창원에서 진주로 옮기고 절도사가 목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진주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다.

2. 진주농민항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향촌질서는 점차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지방 수령들의 착취와 탐학으로 날이 갈수록 그 폐해가 심하여 농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특히 봄철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이자를 붙여 받는 환곡의 폐해가 심각하여 1862년 마침내 진주민란이라는 대대적인 농민항쟁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1862년 진주에서는 단성에 이어 2번째로 농민항쟁이 발생했다. 진주 농민들은 점차 무력봉기를 일으키면서 각지의 양반, 무단토호, 보수적 요호부민(饒戶富民) 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조정에서는 박규수(朴珪壽)를 진주안핵사(晋州按覈使)로 임명해 수습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민란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다른 지방의 농민을 자극해 이 해에 전국에 걸쳐 30여개 지역에서 농민이 봉기하였다.

3. 진주을미의병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조선에 세력을 뻗친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일제의 만행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이른바 을미의병이 형성되었는데, 진주에서는 안의 출신의 노응규(盧應奎)가 1896년 1월 동지를 규합하여 진주성을 공격, 이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진주부민들은 정한용(鄭漢鎔)을 진주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의진(義陣)을 조직, 노응규 의진에 합세하였다. 진주성을 점령한 노응규 부대는 이후 단성, 고성, 하동, 함안 등지를 거쳐 부산을 점령하려고 김해까지 갔으나 노응규정한용을 대표로 하는 수뇌부의 의견 불일치로 포기하고 진주로 돌아왔다. 결국 이 무렵 조정에서 파견한 관군에 의해 진주성은 점령되고 3개월여에 걸쳐 펼쳐졌던 진주의 한말 의병투쟁은 막을 내렸다. 진주의 을미의병은 비록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희생을 낸 채 해산하였으나 임진왜란 당시의 항일정신을 면면히 이어오면서 다시 한 번 대내외에 진주인의 애국정신을 과시한 의거였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01 2011년 한자(문) 재검토 작업 1) 꿀·밀[黃蠟]·녹포(鹿胞)·문어 ->꿀[黃蠟]·녹포(鹿胞)·문어 2) 조선 전기 1477년(성종 8년) 공조판서 양성지가 올린 차자를 보면 ->조선 전기 1477년(성종 8) 공조판서 양성지가 올린 차자를 보면 3)촉석루 옆에 서 있는 의기사(義妓嗣)는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촉석루 옆에 서 있는 의기사(義妓祠)는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4)박규수(朴珪壽)를 진주안핵사(晋州按逆使)로 임명해 수습하게 하였다 ->박규수(朴珪壽)를 진주안핵사(晋州按覈使)로 임명해 수습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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