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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열단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2036
한자 晋州義烈團事件
영어의미역 Jinju Righteous Patriots Corps Incid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형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무력항쟁
발생(시작)연도/일시 1920년 6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21년 3월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중국 상해
발생(시작)장소 경상남도 진주시|경상남도 창원군
관련인물/단체 김원봉(金元鳳)|배중세(裵重世)|강상진(姜祥振)|이주현(李冑賢)|윤세주(尹世冑)

[정의]

1920년 의열단(義烈團) 최초로 국내에서 폭탄의거를 계획했다가 발각된 사건.

[개설]

1919년 중국에서 창단된 의열단은 일본인 고관 및 한국인 민족반역자 처단과 식민통치의 주요기관 및 시설물 폭파를 목표로 삼았다. 즉 의열투쟁의 목적은 일반 대중의 각성과 아울러 대대적인 반일봉기를 촉발시킴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 종식과 친일배를 응징함에 있었다. 맹목적인 테레리즘이 아니라 식민지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독립운동노선 중 하나였다.

[목적]

의열단의 1차적인 목표대상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조선은행·매일신보사와 사이토[齋藤實] 총독 이하 요로대관 등이었다. 이는 식민지배의 통치기관·폭압기구·선전기관·수탈기구 등의 파괴, 식민지통치기구의 수뇌·요인과 친일·부일배를 응징함으로써 일제 스스로 식민지 경영을 포기하게 한다는 노선이었다.

[발단]

1920년 3월 김원봉 등은 상하이[上海]에서 제조한 폭탄을 안동현(安東縣) 원보상회 이병철에게 우송하였다. 이병철로부터 이를 받은 밀양 김병환(金餠煥)은 마루 밑에 숨겨놓았다가 밀정의 제보로 4월 중순경 경기도경찰부에 압수당하였다. 폭탄 압수와 동시에 서울 일대에는 특별경계령이 내려졌다.

[경과]

이 무렵 김원봉과 이성우(李成宇)의 부탁을 받은 이병철은 폭탄 13개 분량의 폭약과 탄피, 권총 2정과 탄알 100발 등을 구입하여 부산진역 화물운송점으로 보냈다. 단원 배중세는 창원군 진영의 강상진 창고에 보관하여 거사일에 서울로 보낼 예정이었다. 무기 반입과 더불어 단원들도 국내로 잠입한 후 서울·부산·마산·밀양 등 각자의 연고지에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곽재기 지휘하에 무기관리와 운반, 폭탄투척 등에 관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6월 16일 서울의 중국음식점에서 경기도경찰부 김태석의 급습을 받아 체포됨으로써 국내에서 활동한 단원들도 피해를 입었다. 진주 출신 이주현도 체포되어 1921년 6월 22일 경성지방법원 결심공판에서 1년형을 선고받았다.

[결과]

의열단에 의한 밀양폭탄사건은 3·1운동 이후 세상의 이목을 가장 놀라게 한 대사건이었다. 조선총독부 당국자에게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실패의 경험은 이후 의열단으로 하여금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게 하는 계기였다.

[의의와 평가]

초기 실패는 의열단의 향후 진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엄격한 단원 선발, 치밀한 단원 훈련, 국내와 연결망 구축 등은 이러한 반성적인 경험의 산물이었다. 1920년 9월 박재혁(朴載赫)의 부산경찰서 투탄의거와 12월 최수봉(崔壽鳳) 밀양경찰서 투탄의거, 1921년 9월 김익상(金益相) 조선총독부 투탄의거로 이어지는 등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미를 되살리는 기폭제였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관** 디지털진주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리며, 인용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2.11.20
d*****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201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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