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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2065
한자 晋州公立高等普通學校
영어의미역 Jinju Public Higher Normal School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지도보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판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학교|교육기관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설립연도/일시 1925년연표보기
교장 고력득웅(高力得雄)[초대교장]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었던 교육 기관.

[개설]

1919년 경상남도 진주의 유지들이 모여 설립운동이 시작되었다. 1925년 4월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1951년 진주북중학교와 진주고등학교로 분리·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설립경위]

조선의 교육열이 높아가던 1919년 11월 지역의 유지들이 남자중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모임을 가졌고, 1920년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 기성회가 조직되어 1923년 10월 진주일신고등보통학교의 인가를 얻었다.

그러나 남자학교가 항일독립운동의 온상지가 된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가 일제와 협의하여 1925년 3월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 1925년 4월 16일 경남고시 제42호로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어 4월 24일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변천]

1925년 4월 경상남도 공립사범학교(현 진주교육대학교의 전신)의 일부를 빌려서 개교하고, 1926년 4월 1일 현재의 교사(校舍)로 이전하였다. 1938년 4월 1일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5년제인 진주공립중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50년 4월 1일 교육법에 의하여 6년제인 진주중학교로 바뀌었다. 1951년 9월 1일 교육령 개정에 의하여 진주중학교 제 1, 2, 3학년은 진주북중학교로 분리하고, 제 5, 6학년은 고등학교 2, 3학년에 편입함으로써 진주고등학교로 분리·개편되었다.

[활동사항]

1928년 7월 초순 일본인 영어교사 증전(增田)이 학생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와 상식 이하의 태도를 보여 왔으므로 전교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진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과 연대하여 항일동맹휴학을 하였다. 1930년 1월 17일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과 함께 전교생이 거리로 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하여 항일정신을 드높였다.

1932년 11월 14일 학생비밀결사사건이 발생했고, 1933년 11월 25일에는 학생 장호관 등이 만든 ‘사회과학연구’라는 비밀결사가 발각되어 22명이 검거 되었는데 이것을 ‘독서회사건’이라고 한다.

1938년에는 ‘인고단련(忍苦鍛鍊)’ 시간에 일어난 11인 사건이 있었고, 1941년 3월 3일 졸업식 후 졸업생 60~70명이 졸업 기념품으로 받은 일본개국신을 봉안한 ‘가미다나’를 파괴하고 ‘쾌지나칭칭’을 부르며 시위에 들어간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15명이 연행되고 1명은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학생현황]

1925년 입학생은 150명이었다. 1938년에는 입학생이 434명이었으며 1939년에는 438명이었고, 일본인 입학자도 16명이나 되었다. 학급수는 10학급이었다.

[시설현황]

1926년 4월 1일 현재의 교사로 이전하였다. 1935년 10월 5일 창립 10주년 기념도서관을 신축하였다. 1939년의 교지 면적은 14,769평이었다.

[교직원 현황]

1925년 개교 당시 초대교장은 고력득웅(高力得雄)이었고, 교원은 7명이었다. 1939년 교직원수는 21명이었다.

[의의와 평가]

일신재단의 남자 중등학교 설립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워진 공립 남자 중등교육기관으로, 학생들의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은 일제에게 민족의 얼이 살아있음을 보여 주는 계기가 되었다. 끝없이 계속된 학생들의 항일 시위운동은 진주지역민은 물론 우리나라의 온 국민의 가슴 속에 민족의식을 다지게 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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